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보는데, 2010년대까지 혹은 현재까지 가장 훌륭한 평론집을 한 권 꼽자면
신형철 평론가의 『몰락의 에티카』를 빼놓을 수 없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 발언이 유효할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독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몰락의 에티카』는 두 학자의 사유를 중심으로, 그러니까 라캉과 들뢰즈의 사유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어.
『무진기행』이나 『올드보이』같은 작품의 해석은 철저하게 라캉 식 사유를 따르고 있고, '뉴웨이브'로 묶인 2000년대 시인들의 작품들은 철저하게 들뢰즈 식 사유를 따르고 있지.
하지만 알고 있는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이러한 담론들은 이제 수명이 다해 가고 있고, 『몰락의 에티카』의 아류 같은 글만 넘쳐 나고 있는 실정이지.
아무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앞으로의 사유, 앞으로의 평론은 다름 아닌 이수명 시인의 그것을 따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어.
제목에서 밝힌 것처럼 이수명 시인의 사유는 '들뢰즈'와 '블랑쇼'를 따르고 있고, 조금 더 나아가자면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서의) 불교'를 좇고 있어.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표면'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캐치했을 거야.
들뢰즈에 따르면 '표면'이란 다름 아닌 '생성의 공간'이야.
무슨 뜻인지 이해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텐데, 내가 약간의 자의적인 해석과 니체적인 해석을 곁들여 설명해 볼게.
우선 '표면' 혹은 '표면의 시'는 '깊이가 없음'을 뜻해. 이수명 시인이 긍정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깊이 없음'이지.
깊이가 없는 게 왜 중요할까. 혹은 그게 무슨 의의가 있을까. 모름지기 시란, 그리고 문학이란 자고로 깊이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깊이'의 기원을 알아볼 필요가 있어.
니체가 『도덕의 계보』 두 번째 논문에서 말했지. 인간의 이성은 형벌에서 비롯되었다고.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들이 집단을 이루다 보면 어쩔 수 없지만 돈을 꾸고 꿔주고 하는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데,
간혹 변제의 의무가 깨질 경우 채권자는, 채무자 신체에 형벌을 가하고 채무자에게 변제의 의무를 상기시키지.
그러면 채무자, 즉 돈을 갚지 못한 자는 신체에 가해진 형벌 때문에 '이성'이 생겨나지.
아이들이 매를 맞거나 하면 갑자기 이성적인 존재가 되고, 그때 비로소 말을 잘 듣는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이러한 이야기는 푸코 또한『감시와 처벌』에서 한 적 있는데, 여기서는 말을 아낄게.
아무튼, 인간의 이성은 형벌에서 비롯되었는데, 많은 학자들에 따르면 이는 자연스러운 상태는 아니라는 거야.
즉 인간적이고 또 너무나도 인간적이며, 문명적이다 못해 인위적이면서 인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
자, 이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갈게. 이수명 시인은 '표면' 즉 '깊이 없음'을 긍정한다고 했지.
여기서 말하는 '깊이'란 뭘까. 이미 눈치 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깊이'는 바로 '이성'이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자기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성적인 사람'이고, 또한 말 그대로 '뭔가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이지.
바로 그것을 이수명 시인은 말하고 있어. 우리 인간은, 그리고 우리 시인들은 너무나도 인위적인 삶을 살고 있고 자연스러움을 거스르고 있다고. 그러면서 앞으로의 문학은, 그리고 그러한 시는 '깊이 없음' 즉 '표면'을 지향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구체적인 대안, 그러니까 그러한 언어는 어떤 언어일까.
글쎄, 일단 시인은 이 책에서 인공지능의 언어도 많이 언급하고 있어. 물론 그것을 지향점으로 보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인공지능 식의 무언가, 또는 들뢰즈 식의 기계적인 것들.. 그런 것들을 긍정하고 있어.
예전에 이런 기사 본 사람도 있을 거야.(아래 사진 및 링크 참조)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170802/85626900/1
<span style="font-family:'Malgun Gothic', '맑은 고딕',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2pt;color:rgb(0,34,102);">인간 따돌린 ‘AI끼리의 대화’</span><span style="font-family:'Malgun Gothic', '맑은 고딕',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2pt;color:rgb(0,34,102);">기계가 인간에 도전하는 ‘바벨탑’의 꿈을 꾼 걸까. 혹은 그저 옹알이를 한 걸까. 인간의 언어를 모방해 학습하던 인공지능(AI)이 기계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span>www.donga.com인공지능 A와 B에게 대화를 훈련시켰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이 이해 못 할 언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물론 속단일 수도 있겠지만, 미래의 언어 혹은 미래의 문학은 위 사진과 같은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어.
말 그대로 '깊이'가 없고 '표면'만 남은 언어. 인간의 이성이 제거될 수 있을 만큼 제거된, 그러한 형태의 언어.
그러면 비로소 들뢰즈가 얘기한 '표면'의 시대, '생성'의 공간이 드러날지도 모르지.
여기서 또 누군가는 의문을 품을 것 같은데, 어째서 '표면'이 곧 '생성의 공간'이 되는 걸까.
음, 그건 위에 이미 힌트가 있는 것 같아. '깊이'가 사라져서 '표면'만 남게 되면, 다시 말해 인간의 '이성'이 사라져서
'자연 그대로'만 남게 되면, 인간은 아주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나고, 그러면 어느 하나의 역할에 묶이지 않아도 되므로
어디든 훨훨 날아가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생성'을 몸으로 느끼고 또 그렇게 알게 되는 거지.
그리고 그게 바로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서의) 불교 사상인 것이지. 왜냐하면 나의 자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게 바로 불교의 핵심 사상이니까...
긴 글, 그리고 책의 본론과 상관없는 글 읽어줘서 고마워.
마지막으로, 이 시론집 한두 페이지 정도 소개하면서 줄일게. 생각 있는 사람들은 꼭 구매해서 읽어보길 바라.
(*물론 '이런 게 무슨 시냐' 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나는 존중하고 깊이 이해함. 내키지 않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 주길)
+) 이 책이 '블랑쇼'의 철학을 따르고 있다고 밝혔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깜빡 잊고 빼먹었네. 이수명 시인은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을 자주 인용하거든. 그리고 블랑쇼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바깥dehor'이고. 아무튼 본문과는 연관이 없는 것 같아 다루지 않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