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바깥은 이거임.
"현상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려 후설의 지향성이나 하이데거의 마음씀 같은 개념을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중성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
이거든?
그런데 이렇게 보면 대체 왜 "도래할 책" 등에서 그렇게 바깥에 대해 좋아했는지, 포착하고 채택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긴 함.
문제는 이거임.
이건 절대 들뢰즈가 바깥을 해석한 방식이 아님.
들뢰즈가 어떻게 바깥을 해석하는지는 들뢰즈의 책 "푸코"에서 나옴.
(푸코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바깥의 사유"라고 해서 블랑쇼에 대한 글을 쓰고 블랑쇼를 치켜세울 뿐만 아니라 자기 철학에서 이런 "바깥"을 보이는 데 방점을 찍어둔 것으로 알려진 사람.
나중에 블랑쇼가 다시 그 말에 답변하는 글도 쓰고 아무튼 블랑쇼는 푸코 해석에는 동의함.)
들뢰즈는 어떻게 말했냐. 이렇게 말했음.
"인간 자체가 생명을 구속하는 특정의 방식이므로 생명을 해방시켜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 자체로부터이다. 권력이 생명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 때 생명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 된다.
권력이 생명권력으로 변형되는 순간, 저항은 어떤 다이어그램의 특정한 종류, 환경 및 궤적에 한정될 수 없는 생동하는 권력, 생명에 대한 권력이 된다. 바깥에서 오는 이 힘은 '생명'이라는 하나의 관념, 푸코 사유의 정점을 이루는 하나의 생기론이 아닐까? 생명은 힘으로부터 나오는 이러한 저항의 능력이 아닐까?"
들뢰즈에게 바깥은... 생명? 이자 힘? 을 포옹하는 한 방식? 이라고 하는 거 같음?
블랑쇼는 또한 들뢰즈에게는 답변하는 글을 쓰지 않았음 (들뢰즈보다 오래 삼).
이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함. 왜냐면 "바깥에서 오는 힘"이란 건 정말 블랑쇼에겐 어불성설에 가깝기 때문...
바깥은 죽음보다 더 크게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개념에 가깝고, 이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는 것임.
그냥 딱 단적으로 말해, 블랑쇼가 "카오스의 글쓰기"에서 바깥으로 둔 것 중에 하나가 홀로코스트임.
그런데 이게 어떻게 생기론 엘랑비탈이겠냐고??
https://youtu.be/AzFJUrKO8U0?si=4Fpt2sKhl4167XFF
잘알이네
이런 거 더 없나
아도르노 비동일자 같은거임?
말할 수 없음이 계속 발생하는걸 생기로 볼 수는 없나
뭐 들뢰즈의 창조적 오독이라고 하는 게 나을 듯 푸코랑 달리 들뢰즈는 블랑쇼의 바깥 개념을 그대로 살릴려고 하면 니체랑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을 포기할 수밬에 없으니
들뢰즈랑 푸코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도는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