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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뒤로 천천히 읽다가 간만에 <트윈 픽스> 시즌 3을 본 뒤에 마저 보려 했건만 정작 이 때쯤의 인터뷰는 없었다. 원서가 2009년에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어쨌든 린치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며 하나씩 읽어보기에 좋았던 책이다. 기본적으로 린치가 언어로 구체화되는 아이디어를 그리 보고 싶어 하지 않고, 영화의 해석이라는 더 뚜렷한 줄기를 제시하는 건 더 질색하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런 건 영화를 한 번 다시 보는 게 더 낫기는 하다. 누가 했던 말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한 학자에게 무엇을 설명해달라고 하자 자기 책을 읽어보라며, 자기보다 그 책이 훨씬 더 잘 설명해줄 거라고 대답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실제로 린치 본인에게도 자기 영화를 한 스토리 라인으로 깔끔하게 정리해보라고 하면 골치 아프지 않을까?



인터뷰 속의 린치는 50년대의 전형적인 미국 백인 남성이, 소년스러움을 여전히 품고 일종의 꿈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 꿈에서 나오는 환상이라는 것이 흔히 '환상적'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지는 않다. 97년도 인터뷰의 마지막에 나오는 촌평이 인상적인데, 린치와의 인터뷰 이후 그의 전시회에서 온갖 "심란"한 사진들, "하이힐, 다리, 엉덩이, 젖가슴을 클로즈업으로 잡은 스냅사진 10여 점, 얼굴과 단절된 여성 신체 부위들 컷", "한 여성이 소파에 누워 있는 전신사진이 있는데 그다음 사진에는 펑 하고 퍼지는 연기뿐 그 소파에 아무도 없"는 그 전시들을 보며 "연쇄 살인범의 벽을 쏙 빼닮았다"는 생각을 하던 그는 이렇게 말을 남긴다. "린치는 기이한 영화들을 계속 만드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나마 그가 캔버스에 매달려 있는 요상하게 처리된 소고기 덩어리를 못 본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블루 벨벳>과 <트윈 픽스>를 보고,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린치는 인터뷰에서 몇 번이고, 자신은 자신이 살던 바로 그 세상을 좋아하며, 그 세상에는 생각 이상의 잔혹한 폭력이 늘 숨어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고 밝힌다. <블루 벨벳>과 <트윈 픽스>는 바로 그 옛 미국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그 평화로워 보이는 교외에 숨어 있는 끔찍한 범죄나 악의를 현실적이지 않은 꿈 같은 방식으로 드러내는 영화다. 그리고 린치의 이 마음 속 고향은 어느새 <선셋 대로>가 담고 있는 할리우드로 옮겨진 듯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인랜드 엠파이어>는 비록 전자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투영된 방식이지만, 바로 그 마음 속 고향을 욕망이 섬뜩하고 기괴하게 얽히는 꿈 속에서 그려낸다. 어떤 의미에서 그 배경과 방식은 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현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린치는 말 그대로 사람의 욕망과 의도를 거의 신비주의적인 태도에 가깝게 따라가며, 이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아이디어를 그대로 옮기는 방식으로 영화의 각 신을 찍는다. 그런 그가 영화 작업을 하며 바라본 할리우드의 역학은 이전까지 다뤘던 옛 고향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기괴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을 드러내는 영화 첫 장면의 댄서들, 그리고 클럽 실렌시오는 이 탈부착 가능한 감각을 극단적으로 전시한다. 욕망 역시 탈부착되는 것은 매한가지라, <현기증>에서 매들린의 분장을 통해 표현되는 '타인의 욕망'은 <멀홀랜드>에서 사실상 한 세계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선셋 대로>에서 나온 차가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도로를 달리다가 그대로 나온다는 점은, 우리에게 그 옛 할리우드에 대한 향수보다는 외려 <로스트 인 하이웨이>나 <트윈 픽스> 시즌 3에서 표현되는 괴상하게 재배치된 현실에 대한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쪽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린치의 강박적인 생활 습관도 이해가 된다.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변하고 있다면 이런 지저의 악의, 기괴한 재배치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키에르케고어에 대한 현대의 재방문이 말하듯, "이전에는 주체성이 스스로를 체계의 무한한 내적 명증성, 즉 절대정신에 연결시켜야만 했던 반면, 지금은 주체성이 명증성 못지않게 체계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내적 의심에 스스로 동의해야만" 하는 현대에 꿈이 얼마나 허망할까? 그렇기에 린치는 늘 자신을 어떤 한 안정적인 체계 속에 위치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 무언가 그리 되어선 안 되는 것이 눈에 보이게끔. 물론 어떤 경우에 그건 우스꽝스러운 촌극이기도 할 테고, 어떨 때는 무시무시한 경험이기도 할 테며, 사실 동시에 그 둘일 경우가 더 빈번할 테다.



P. S. 책 말미의 필모그래피에서 <Today's Number Is...>와 <Weather Report>가 있어서 약간 웃음이 나왔다. 다시 찾아보니, 안젤로 바달라멘티의 죽음 이후 이 시리즈도 끊긴 모양이다. 별로 웃음이 나오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