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24b0d121e09c28a8699fe8b115ef046c64f02f48


올리버 색스의 <뮤지코필리아>가 수집하는 수많은 사례들은, 비록 저자의 음악 선호로 인한 강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사실 그리 인간에게 선천적인 것이 아니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또는, 언어가 그러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언어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음악을 버려야만 했다.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든 그건 비슷한 확률로 보이지만, 양쪽이 암시하는 바는 당연히 극단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울부짖음은 이미 언어였으며, 음악은 늘 우리 외적으로 존재했다. 그것은 자연과 동물의 소리였고, 우리를 자연의 거대한 힘 속에서 추동하는 소리였다. <음악 혐오>는 나치 수용소에서 음악이 했던 역할을 중심에 두고, 무엇이 음악의 근본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이런 결과로 나왔고, 그렇기에 어떻게 현재처럼 음악이 무한정 복제되고 편재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를 작동시키고 있는지를 아포리즘 형태로 기록한 책이다.



최초의 동굴 벽화들이 그려진 장소를 단순한 장소 이상의, 그 안에서 음이 진동하는 일종의 천연 악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 키냐르는 동물의 소리를 흉내내는 샤먼의 안에서 이 사이하기 짝이 없는 음악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물의 영혼을 포착해 자신의 안에 품고 그 소리를 그대로 내며 동물을 유인하거나 사람들 모두를 그 위대한 합일의 순간에 붙잡아놓는 그는 사실상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나 두려워하는 신체 강탈자의 원본이다. 수많은 공포스러운 이야기와 전설들은 기실 인간의 잔혹사를 담고 있다. 자신의 손톱을 먹은 쥐가 자신과 똑같은 몸이 되어 자신과 같은 말을 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은 바로 인간이 실제로 그리 해왔기에, 자신이 사냥감이 되어 그 잔혹한 모든 일들이 이제 자신에게 쏟아지리라는 일종의 무의식적 반성에 가깝다. 동물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뿔을 불어 그것을 부르는 것과, 인간의 말과 똑같은 말을 하며 웃는 낯익은 낯선 이를 보듯이.



사실 <음악 혐오>의 중심 주제는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형식 역시 아포리즘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노골적인 레퍼런스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에게 홀리는 순간, 아도르노는 오디세우스가 이 음악을 즐기려고 한다고 말하지만 키냐르는 반대로 오디세우스는 이 음악에 붙잡힌 신세가 됐을 뿐이라고 말할 뿐. 음악이 그 청자에게 부여하는 리듬과 활력은 거의 강제적으로, 보고 싶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있는 것과 달리 듣는 것을 거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음악은 그 태어났을 때의 속성 그대로, 이제는 동물 대신 사람을 사로잡아 자신의 무드에 맞게 조종하려 든다. 아도르노에게 이성에 기반한 계몽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억압할 수밖에 없듯, 키냐르에게 음악이 나치 수용소에서 사용된 것은 근본적으로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현대에 우리는 말 그대로 음악에 사로잡혀 있다. 온갖 곳에서 무자크, 혹은 차트 음악이 나온다. 전자는 그나마 우리에게 긍정적인 무드를 부여해 간접적인 이득을 꾀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후자는 사실상 우리에게 욕망을 부여한다. 우리의 인기곡들이 우리에게 익숙해진다는 점과, 캐치함을 주된 장점으로 내세운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대중음악이 태동하던 시절부터 음반 회사들은 잘 나가는 라디오 DJ에게 돈을 주며 자기들의 음악이 훨씬 더 많이, 자주, 사람들에게 울려퍼지며 기억되도록 하였다. 이는 무엇을 추천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는데, 그 짧고 단순한 곡들은 실제로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귀에 온전히 꽂힐 수 있었던 탓이다. 대량 복제되는 음악은 현대의 분위기를 장악했고, 우리에게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무드를 계속해서 부여한다. 도시인들이 단 하루라도 완전히 침묵 속에 있는 순간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앰비언트와 사운드스케이프는 가히 이 음악의 진보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의 소리를 사로잡고, 인간의 소리를 사로잡는 데에 성공한 음악은 기어이 자연의 공간을 사로잡는다. 메시앙이 시간을 사로잡으려고 했다면 (이 시도에서 바로 그 음악의 시초인 새를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것을 주목할 만하다) 앰비언트는 음악이 퍼져나가며 발견하고, 다시 돌아오는 바로 그 감각을 온전히 보존해낸다. 단순한 필드 레코딩은 그저 소리를 단순히 모사하려 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앰비언트는 이를 뛰어넘어 자신의 힘만으로 그 공간을 구현해낸다. Jon Hassell의 <Fourth World> 연작들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공간을 유인해 음반 속에 담는 데에 성공했다. 아마 미래의 보르헤스는 이런 앰비언트 음악가들을 20세기의 음유시인으로 생각하며, 그 한 시간 동안에 CEO 앞에서 자신이 정복할 땅을 그려낼 수 있었다고 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음악은 이제는 과거를 우리 앞에 소환시킨다. 당시를 담았다고 생각되던 뮤직 홀 음반들은 Caretaker를 비롯한 턴테이블 프로듀서들에 의해 분절되고 왜곡되며 결코 당시에 들리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그럴듯해 보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우리에게 좋았던 그 때에 대한 향수를 반어적으로 불러 일으키며, 우리의 과거를 붙잡아 지금 이 순간 현대의 연장선상에서 그럴듯 할 만한 과거를 조립하도록 한다. (Burial과 Tricky가 어떻게 이와 비슷한 일을 정반대로, 우리로부터 너무나 머나먼 섬뜩한 유령의 소리를 소환했던가?) 유튜브와 여러 인터넷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이 기괴하게 익숙한 과거에 대한 향수는 우리를 '붙잡는다'. 그리고 이 붙잡힘에는 생각 이상의 힘이 담겨 있다. 그것이 과연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추동하느냐는, 우리가 이 음악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아이러니함이 Caretaker의 재밌는 점이다. 복고적인 재즈 음반인지, 죽어가는 기억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