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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와 사변의 필연성 — 헤겔의 『변증법과 회의주의』를 읽고
나는 글을 조금 돌아서 시작하고자 한다. 헤겔은 흔히 근대철학의 완성자로 취급되며, 반드시 넘어서야만 하는 그 어떤 무엇으로 대우된다. 이러한 대우는 그저 전관예우에 불과한가? 오늘 날 "죽은 개"가 된 헤겔을 보아한다면 당연해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헤겔을 필연적인 장벽으로 여기는 이들도 대부분 동일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날 헤겔의 중요성은 어디에서 찾아져야 하는가? 만일 헤겔이 아직도 중요하다면, 헤겔은 과연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는가? 그의 체계는 정당하게 극복되었는가?
여기서 회의주의가 고개를 든다. 2500년이라는 기나긴 철학사에서 회의주의가 (후술할 헤겔의 그것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격퇴되지 못했다면, 이는 즉 회의주의를 제외한 모든 철학적 학설이 결과론적으로는 폐기처분되었다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헤겔 이후의 철학사를 한번 따라가보자.
상식을 전투적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주의는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을 소박실재론적으로 반박하고자 했다. 그리고 나아가 실천으로의 비약을 통해 회의주의를 격퇴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그러한 비약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소박실재론적인 반박은 순환논증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만 맑스주의에 사변적인 계기나 경향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가 발흥한 이후 철학사에 있어서 큰 변화라고 한다면 언어적 전회일 것이다. 그러나 언어적 전회란 결국 광의의 (신)칸트주의의, 그리고 퓌론주의의 변주가 아닌가?
언어로 표상될 수 없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그러한 대상에 관한 의문은 무의미하며, 사실 실재란 언어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 객관성은 언어라는 우리 인식의 틀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
"...회의주의는 체계라고 부를 수도 없고 또 체계이고자 하지도 않는 철학이다." (109p)
"일반적으로 말해서 회의주의의 목적은... ...자기 의식에게 마음의 평정과 안정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의 부동과 안정이 자기 의식의 아타락시아다."(126p)
퓌론주의가 판단중지를 통해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아타락시아를 얻으려 했듯이 형이상학에서, 그리고 후기 비트겐슈타인 등에서 보이듯이 체계에서 벗어나 언어적 혼동이 낳은 철학적 질병을 "치료"하려 한다는 것. 이것이 칸트주의와 퓌론주의의 변종이 아니고 무엇인가. 텍스트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주의'의 선언이, 언어가 존재라는 가다머의 선언이 이의 바깥에 있을 수 있는가.
또한 우리는 현대철학에서 언어적 전회의 자장 바깥에 있는 몇 안되는 철학자로 후설과 들뢰즈를 꼽을 수 있겠다.
후설은 회의주의를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고 하여도 의식에 드러나는 현상 자체는,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에 어떠어떠하게 현상이 드러나는지는 의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적 해결책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익히 알려져있듯이,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단죄되었다.
들뢰즈의 차이 자체의 형이상학에 대해 회의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차이 자체는 동일성 자체와 무엇이 다른가? 차이 자신이 차이-임이라는 동일성을 갖지 않는가? 아니라면 그것을 차이라고 생각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다만 푸코를 이 글 전체의 예외로 두고 싶다.)
따라서 회의주의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은 회의주의가 아닌 모든 철학적 학설을 무화시키고 있는 채로 남아있다.
(혹자는 헤겔 이후의 200년짜리 철학사를 이렇게 몇문단으로 정리하는 것에 반발감이 들 수 있고, 본인도 쓰면서 들지만 글의 주제는 철학사가 아니라 회의주의이니 대충 봐주시라.)
헤겔에 따르면 회의주의자는 어떠한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제출하는 학설에 대해 그 어떠한 것의 타자를 대립시켜 제출한다. 그를 통해 모순을 보여준다.
"즉, 그에게 동일성이 제시되면, 그는 비동일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가 방금 언표한 비동일성을 이제 그에게 돌려주면, 그는 동일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정신현상학』, 아카넷, 201p)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내용은 그와 대립하는 것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이렇게 동일한 것에서 모순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제출되든 간에 그와 대립되는 것 역시 타당하다는 것이다. (...) 회의주의자들의 논변 방식에서 보편적인 원리는 모든 규정된 것, 주장된 것, 사유된 것에 타자를 대립시키는 것이다."(132~133p)
헤겔은 특정한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체계(의식)에서는 그 특정한 것의 반대항 또한 절대적인 것으로 제출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회의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회의주의는 참 된 철학이 포함해야할 한 계기인 것이다.
"부정적인 것에 관해 이런 의식을 획득하고 부정적인 것의 형식을 이렇게 명확하게 사유했다는 것은 회의주의에게 돌려야 할 영예다."(165p)
"말하자면, 회의주의는 본래적으로 사변적인 이념들을 다루었고 그것들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유한한 것에서 모순의 제시는 사변적으로 철학하는 방법의 본질적인 요점이다."(168~169p)
그러나 회의주의는 그저 모든 것을 무화함으로서 아타락시아를 찾는 것에 안주하여 A와 ~A간의 연관을 보지 못한다. 순수 존재를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독단론자에 대해 순수 무를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움으로서 (그러나 자기지시적 모순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내세움은 일시적으로만 유지된다) 독단론을 반박할 수는 있겠지만, 순수 존재 내부에 순수 무가 있음을 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의주의는 A와 ~A의 교호성을 부정하는 형식논리학적 사고에 대해서만 효력을 발휘한다. 헤겔에 따르면 회의주의는 모든 타자를 포섭하여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사변적 사유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회의주의는 사변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 그것은 자기 내에서 둥글고, 이 규정된 것과 더불어 이 규정된 것과 대립하는 것을 자기 곁에 포함한다. (...) 사변적인 것에는 타자가 이미 그 자체 포함되어 있다."(169p)
예를 들어 헤겔에게 차이는 동일성과 부정적인 자기관계, 즉 차이는 동일성을 자기 내의 타자로 포함함으로서 차이로 성립하고, 그 역도 그러하기에, 회의주의가 동일성을 차이의 타자로 제출하여도 그것이 이미 차이에 포섭되어 있기에 효력을 상실한다.
회의주의가 사변철학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변 아닌 것으로 만드는 일종의 쉐도우복싱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헤겔은 말한다.
"그러나 회의주의는 이념으로서의 사변적인 것에 대해서는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 회의주의의 공격이란 참된 무한한 것[사변적인 것]에 대해서는 불충분하다. (...) 따라서 회의주의는 무한한 것에 옮을 묻힌 후에야 무한한 것을 할퀼 수 있을 뿐이다."(170p)
이러한 헤겔의 논변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헤겔을 내재적으로 비판하거나 헤겔을 받아들이거나의 양자택일을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헤겔리안이 되거나 그를 변증법적으로 초극하거나 둘 중에서 택일해야하는 운명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뒤집어 사용하자면, 헤겔은 "이 시대의 연옥"이요, "불의-강(Feuer-bach)"이다.
"...진리와 자유에 도달하려면 불의-강(Feuer-bach)를 통과하는 수 밖에 없다. 포이어바흐(Feuerbach)는 이 시대의 연옥이다."
후자의 길을 걸은 철학자의 대표로서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 비판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여기서 포이어바흐는 주어와 술어를 전도시켜 인간의 본질이 신에게 투사되었다고 논한다. 그리고 헤겔의 절대정신도 그러한 투사에 불과하다고 규정한다.
동시에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철학을 내재적으로 비판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헤겔이 엔치클로페디에서 제시하는 삼분적 학문체계는 그 각각이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그 중 하나인 자연철학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이어바흐의 헤겔 비판과 종교 비판은 동치될 수 있는가? 포이어바흐 자신이 그것을 의도했음은 분명하지만, 종교 비판 측면에서의 헤겔 비판은 단순히 헤겔이 신학적 논리를 반복하고 있다는 비판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 논리가 가진 내재적 모순이 폭로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그저 사실기술 내지 선언이지 비판이 될 수 없다.
만일 헤겔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우리는 헤겔에 대한 내재적 비판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리고 헤겔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 함은, 헤겔이 충분히 사변적이지 않음을 폭로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즉 헤겔을 극복한 뒤에도 철학은 사변 없이 해나갈 수 없다.
부정적인 뉘앙스로만 쓰여왔던 "사변"이라는 용어는 다시금 정당하게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 사변철학은 회의주의의 유일한 탈출구이다.
개추
정말 좋은 글이다
잘 읽었습니다.
개추드립니다
지적할 게 있어요. "회의주의가 사변철학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변 아닌 것으로 만드는 일종의 쉐도우복싱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한 뒤 인용 문구에선 "무한한 것에 대해서는 불충분하다"라고 했죠. 그런데 무한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 주장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스피노자의 무한을 빌려 이것을 분할될 수 없고 자기 원인인 것이라면 어떨까요? 만일 스피노자대로라면 자기 분유 개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대로라면 사변은 아마 여기서 쓰이는 것과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질 것입니다.
전혀 다른 관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혹시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일단 제가 이해하는 사변은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관계하고 있어서 무한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의 개념의 운동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자기관계이고, 그런 나옴이 자기 분유이고 또 무한이 스피노자식 무한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어떤 부분인지 (문자 그대로) 모르겠습니다.
스피노자에게 부딪힐 수 있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티카 1부 33절 부록에서 - "신이 선을 지향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신이 일정한 목적으로서 자향하는 어떤 것을 신의 밖에 상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실히 신을 운명에 종속시키는 것이며..."
바로 이런 점에서 에티카 제1부와 제4부는 약간 긴장이 있습니다. 4부에서는, "우리는 인간본성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의 관념을 형성하고자 한다... 선이란... 인간 본성의 전형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인간을 더 완전하다거나 불완전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변호하길 "하나의 본질 또는 형상에서 다른 본질 또는 형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그의 활동능력이, 그의 본성에 의하여 이해되는 한에 있어서, 증대하거나 감소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하죠. 헤겔의 입장에서는 스피노자의 신관은 괴이해 보이겠지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은 괴이할 뿐만 아니라 아무래도 헤겔의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부류일 겁니다.
갖가지 종류의 회의주의가 고대로부터 쭉 존재해왔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정신의 헤겔식 변증법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