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사람들 마지막 독회입니다
정해진 분량인 <죽은 사람들>을 읽어오신 분들은 댓글에 감상을 남기시고 자유롭게 토의 하시면 되겠습니다.
다음 독회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더블린 사람들 마지막 독회입니다
정해진 분량인 <죽은 사람들>을 읽어오신 분들은 댓글에 감상을 남기시고 자유롭게 토의 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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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놓고 말해 요즘 사람들한테 읽히면 이거 백퍼 퐁1퐁이니 뭐니 소리 나온다 ㅋㅋㅋㅋ 사람들이 점점 여러 복합적 상황에 대한 성찰을 버리고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기계들로 변해가는 것 같아 슬픈 감도 들고…. 하여튼 <죽은 이들>은 마지막 문장에서 보이듯 <자매>에서 시작한 ‘마비’라는 키워드를 서선 전체로 종합하는 소설이자 당대 독자들에게 일갈을 날리는 조이스가 보이는 동시에, 가장 추상적인 개념과 내면 의식의 대결까지 사유한 점이 돋보이는 소설임. 분량이 젤 긴만큼 여러 의미로 신경을 많이 쓴 거 같아 조이스가.
마지막 장면에서 게이브리얼은 어째서 눈물을 흘리며 이 감정이 사랑임을 깨달았을까? 사실 요즘 생각하면 아내의 첫사랑 썰을 듣고 아내에 대해 사랑을 느낄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함. 특히나 요즘처럼 애정->섹스로 치환된 세상이라면 남편이 이 얘길 듣고 ‘아 이 여자는 자기 첫사랑이랑 뒹굴대로 다 뒹굴고는 내 앞에서 당당하게 그 추억 회상하는 중이구나’ 싶겠지.
나는 이게 우리가 가진 어휘의 협소함에 대한 문제와 동시에, 디즈니 이래로 남용된 사랑이라는 어휘가 주는 고정관념 때문이라 생각함. 게이브리얼의 본인 처지에 대한 깨달음과 체념과 수용 사이의 어딘가인 감정, 그와 동시에 자신이 모르던 사랑하는 이의 가장 아름답던 시절의 기억, 이미 떠나간 채로 그 추억을 간직한 ‘죽은 이들’과 여전히 생에 몰두하며 꾸깃꾸깃 바스라져 가는 본인들의 대비, 죽음 불사라는 낭만적인 사랑의 모습과 자신은 그런게 없다는 자각과 그러면서 욕정으로 불타오르던 공허감 등등… 복합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며 오는 감정적 반응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죽음이란 여기에 없는 자들이기에 우리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어찌보면 더 이상 고뇌할 것도, 바뀌는 것에 대해 고민할 것도 없이 가장 좋은 상태로 떠난 개념이기에 우리의 부러움의 대상까지 된다고 보임.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긴 힘들겠지. 하지만 가장 순수하게 영혼이 불타던 시절에 죽음까지 자처한 사랑은 이를 가능케 할 것이고….
<더블린 사람들>은 여러모로 인물들의 자각과 변화의 계기가 외부에서 온다는 점에서 고전적이라 생각함(그에 따라 변화할지는 미지수지 조이스가 그리지 않았으니). <젊예초>는 그에 비해 변화의 계기가 내면 의식에서 찾아오고 그에 따라 영웅적으로 이를 극복했다는 점에서(가자 가자 가자 가자!) 차이가 있음. 하지만 그렇기에 <더블린 사람들>은 모두를 위한 소설이 된다고 생각함. 결국 우리 모두는 사실 스티븐 보단 저런 소시민들에 더 가깝기 때문에. 다만 적어도 본인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게이브리얼에 비해 고정관념으로 감정을 속박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는 요즘 세태를 생각하면 ‘마비’에서 깨어날 가능성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
파딱 수고하셨고 곧 있을 젊예초 독회 때 봅시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