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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더스의 <문화적 냉전>이 나온 이후 냉전 시기 서양 문화에 CIA가 어떤 영향을 암중에서 미쳤는지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나왔다. 잭슨 폴록 등의 추상 표현주의와 CIA 사이의 관계가 아마 개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일 테다. (흥미롭게도 냉전이 끝나기 전부터 이미 잭슨 폴록에 대한 이런 분석을 하던 이들이(Max Kozloff, 1973) 꽤나 있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분명한 후원 증거가 나온 것은 냉전 이후에 더 이상 이런 정보들을 은닉할 필요성이 없어진 이후이다.) 물론, 이런 분석은 CIA 같은 냉전 질서가 부여한 추동력과 목적 부여와는 별개로 여러 문화들이 스스로 번성했다는 여러 증거들과 함께 하곤 한다. 다만 이런 연구들은 냉전이 끝난지 한참 되었고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중요하지 않게 된 지금 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가에 대한 조용한 대답을 내준다.



<영화와 문화냉전>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2차 대전 이후 초기 냉전에서 어떻게 범아시아적 영화 제도가 생겨났고, 이것들이 이후 아시아 국가들에서 영화 산업의 발전 및 쇠퇴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분석하는 책이다. 시작은 그 역사적인 맥락상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산주의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에서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보다 더 친화적인 풍토를 조성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아시아재단은 민간의 탈을 쓰고 정부의 돈을 받으며, 아시아영화제를 결성하고 일본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 영화 인프라 개선에 도움을 주며 자본주의적 프로파간다를 좀 더 강조하고 공산주의 국가와의 연합 및 친공산주의적 표현을 최대한 막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일제의 대동아공영 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던 일본 측 인사와, 그런 일본에게 내심 반발하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알력이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영화와>에서 조명하는 것은 이 냉전 속에서의 은밀한 정치적 개입이지만, 반대 측면에서 사실 그런 것이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아시아재단은 사실, 이미 스스로가 자주적이라고 느끼던 정치인 및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반발을 샀다. (한국처럼 정말로 반공에 철저할 수 밖에 없었던 국가는 그렇다고 쳐도) 인도네시아는 어째서 아시아에서 제일 거대한 중국을 굳이 배제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곤 했으며, 인도처럼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아시아 국가가 배제된 아시아영화제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그저 아시아에 자기 영화를 팔고자 하는 일본의 독주가 아닌지-회의적으로 반응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시아영화제는 비록 각국의 영화 인프라에 큰 영향을 줬지만, 그 이상으로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영화 문화에 순기능을 하지는 못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아시아재단이 손을 떼고 난 후 60, 70년대 홍콩과 한국에서 영화 산업이 발전한 양상인데, 홍콩 영화가 미국으로 수출되고 한국 신필름이 정부의 보조를 받아가며 발전하다가 홍콩에서 찍은 영화를 자기네 영화처럼 수입해 들어오는 과정에서, 아시아영화제는 인력 교류의 장 이상의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고, 경합 역시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물론, 박정희 정권 아래의 신필름에게 있어 우리가 일본 영화를 넘고자 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설정해 보여주는 데에는 좋은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로부터 대부분의 자금을 지원 받아 자유 진영 아시아 국가들이 만든 영화를 홍보하다시피 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 영화제가 이런 과정에서 그리 좋은 결실을 내지 못했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나 오랜 역사를 가진 아시아영화제가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 외에도, 당연하지만, "아시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편협한 참여 국가 수에 있기도 하다. 냉전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아시아영화제의 참여 국가 수는 꽤나 오랜 세월 동안 늘지 않았고, 냉전이 끝나자 오히려 너무 넓어져 아시아-태평양 영화제가 되며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영화제에 포함된다. 일전 아시아 여러 국가의 대중 음악을 다루는 <변방의 사운드>를 읽었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동북아시아 너머의 아시아 문화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물론 그건 아시아라는 범주가 정말 무의미할 정도로 넓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나마 가까운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조차도 서로 그리 큰 유사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한자문화권이라는 분류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나지 않나 싶다.) 그런 점에서까지 더더욱, 아시아영화제는 냉전 시절의 낡은 유산에 더욱 가까운 존재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