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밀란 쿤데라 작품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밀란 쿤데라에 대한 호부호를 따지기에는 너무 적은 책을 읽었지만, 그 적은 숫자의 책들이 하나같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글 또한 마찬가지다.


 느림은 큰 이야기 세개와 작은 이야기 두개로 나눌수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다. 작가는 자신이 읽었던 책에 나오는 성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글을 쓴다.
 두번째 이야기는 작가가 쓰는 글로 추정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모든 정치인은 대중 앞의 춤꾼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소심한 한 남성이 곤충학회가 열리는 성에 가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세번째는 작가가 읽은 책의 이야기다. 중세시대의 한 기사의 이야기로, 기사가 귀족 부인과의 하룻밤 격렬한 로맨스를 경험한다. 하지만 다음날 일어나보니 귀족 부인은 사라져있고, 귀족 부인의 정부를 자처하는 남자가 나타나, 부인의 남편의 의심을 자신에게서 기사에게로 돌리기 위해 둘이 짜고 기사를 속인 것임을 폭로한다.


 작은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자면, 하나는 곤충학회에서 20년만에 강연을 하게된 체코 노인의 이야기다. 이 노인은 본인의 소심함 때문에 얼떨결에 반공산단원들에게 기지를 제공하고 그 사실이 들켜 댓가로 20년동안 공사판 노동자로 살게 된다.
 마지막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좋아했던, 현재는 잘나가는 정치인을 사랑하게된 과대망상증에 걸린 여인이다. 못해도 몇십년은 지난 과거사를 들춰내며 자신과 정치인이 사랑에 빠졌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이 여인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정치인을 따라 곤충학회에 가서 남자친구(정치인이 아니다. 이 여자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정치인이면서도 남자친구가 있다)와 대판 싸운다.


 이 세가지 이야기는 처음에는 전혀 정돈되지 않고 혼잡하게 나타난다.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맥락없이 옮겨가고,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혼란은 후반부까지 계속되다가, 마지막에 시공간이 다른 세 인물이 한 지점에서 만나면서 겨우 하나의 이야기로 얽힌다. 그러니까, 즉, 큰 줄기의 세 이야기가 한군데서 모이게 되는거다. 이 과정에서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붕괴되면서 독자의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나 역시 이러한 혼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대다수의 소설이 하나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만화와 같은 방식의 소설이라면, 이 소설은 이야기의 단면을 오려내 그 장면만 집중적으로 묘사한 미술작품 같은 느낌을 준다. 우리가 만화를 볼 때 주제의식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미술작품에서는 상징과 암시를 통해 주제의식을 파악해야만 하는 법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빠르게 살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작가 본인은, 정작 자신이 안정감을 느끼며 즐긴 성에서의 생활을 아내의 불면증 때문에 하룻밤만 즐기게 된다.
 정치인들이 대중의 시선을 신경쓰는 행동을 비난하던 소심한 남자는, 결국 본인 또한 그가 속한 조그마한 그룹의 춤꾼으로 전락한다.
 하룻밤 격렬한 로맨스를 치른 기사는, 그 하룻밤 정사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불명예와 허탈함뿐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체코 노인은 지식의 과시와 우울한 과거로부터 자긍심과 쾌감을 얻었으나, 종국에는 그 모두를 잃어버리고 20년간의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으로부터 자신감을 얻는다.
 마지막 과대망상증 여자는............ 걍 미친년이다.
 

 이 각기 다른 맥락의 글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주제를 억지로 만들어보자면, 그것은 '속도'가 될 것이다. 작가는 글의 중간중간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에 대해서 쓴다. 섹스나 음식섭취와 같은 단기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궁극적 쾌락을 추구하는 삶. 작가는 그 '느리고 지속적인' 쾌락이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빠르고 단기적인' 쾌락과 병행이 가능한 것일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이야기기들을 엮어보자면, 작가는 단기적인 것, 즉 '빠름'과 장기적인 것, 즉 '느림'의 개념이 혼재되어, 상황에 따라 서로의 명칭이 뒤바뀌는 현대인의 '상대적 속도'의 삶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나의 해석에 불만을 느낀다. 이런 식의 해석은 작품에 대한 해석이라기 보다는, '느림'이라는 주제에 작품을 끼워맞춰 해석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꽤나 즐겁고 날카로운 통찰이 종종 등장한다. 그런 식의 통찰력은 분명 감탄할만큼 날카롭고 절묘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너무 중구난방이고 하나의 공통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작품 해석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한가지 사족을 덧붙이자면, 밀란 쿤데라의 약력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체코 노인의 이야기는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올수도 있다. 밀란 쿤데라는 체코가 공산당에 장악당할 때 프랑스로 망명한 대표적인 작가다. 그리고 이 책을 기점으로 그는 체코어를 완전히 버렸다.


 이 탓에 그는 체코 소설의 슬픈왕으로 불리는 보후밀 흐라발과 종종 비교당한다. 공산주의가 장악한 조국에 꿋꿋히 남아 체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글을 쓴 탓에 탄압받은 대문호와 프랑스로 망명해 체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함으로서 명성을 얻은 대문호. 꽤나 드라마틱한 이 구도 속에서 밀란 쿤데라가 느낀 죄책감의 크기는 그가 보후밀 흐라발을 칭송하는 그의 태도에서 찾아볼수 있다. 얕은 지식으로 그 사람의 생각을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 위험한 행위라는 것을 잘 알지만, 어쩌면 이 글에서 나오는 체코 노인의 이야기는 작가가 체코에서 도망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세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남들에게는 어떨런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책의 제목처럼 느리게 읽히는 소설이었다.
 솔직히 두 번은 안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