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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
나는 그 제목에서 일컫는 ‘부분’을 원자물리학에서 주되게 다루는 원자 혹은 입자라고 인식했고, 자연스레 ‘전체‘는 물자체가 되었다. 저자 하이젠베르크가 입자 혹은 원자물리를 전공한 학자였으므로 이러한 추측은 그다지 거짓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을 관통할수록 박히는 느낌 하나는, 그의 서문과 같이, 본작은 단지 자연과학에 관한 토론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부분’은 무엇인가. 그것은 집단에의 과학자다. 학문이라는 인류가 집대성한 가장 놀라운 발명품 아래, 그곳의 최전선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개인 하나하나가 ‘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개체가 모여 만든 ‘과학자’라는 대명사가 다시 ‘전체’가 된다. 1차 세계대전을 청년혁명으로 살고 2차 세계대전을 물리학도로서, 다시 말해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원자폭탄의 개발-가능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지낸 그는 전체가 개인을 지우지 않고 다만 하이젠베르크 그 자체로 남으리라는 의지를 담아 제목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전운을 목견한 학자의 에티카. ‘부분과 전체’라는 표제는 지극히 논리적이기도 하다만 더할 나위없이 도덕적이며 몹시 정치적으로 다가온다. 하이젠베르크는 시대를 오도하는 자가 아니다. 이것은 오펜하이머를 향한 모욕 또한 아니다. 오토 한의 이론으로 핵무기 개발 가능성이 열린 이래 그들이 행한 모든 것들이 전쟁사의 지대한 물줄기를 이루었다. 당시 각자가 믿는 윤리와 이익에 따라 결정된 선택들은 많은 논란과 비판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한낱 위인이 사후의 평가를 고려하여 말을 보탤 것들이 아니다. 내 생각은 그러하다.
수학이 아니라 물리학에의 투신을 감행한 저자의 생애는 어린 시절에서부터 표상과 실재에 대한 대토론 따위로 가득하다. 과학은 귀납의 영역이다. 경험으로 일군 정보는 연역과 달리 - 그렇다고 연역이 반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 반증가능성(칼 포퍼)을 태생적으로 내포한다. 이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경험은 참인가. 경험을 가공한 표상은 타자에게 스스로가 판별한 것과 같은 정도의 것을 전달가능한가. 애초에 그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다소 언어철학적인 말들은 답을 내지 못하고 책 전체를 감싸 안아, 결에 이르기까지 이렇다 할 결론이 없는 채로 남아 있다. 과학에서의 표상은 개념과 같이 곧 서로의 약속이다. 아인슈타인에 의해 동시성이 흔들리고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근거기반의 예측이 불가해지기 시작한 시대. 그 시간을 살면서 사람들은 자연의 불온함의 발견을 인간사회로 옮겨온 듯 사회의 체계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리하여 파시즘이 유럽 전역을 감싸며 광기와 인간 불신이 피어났다. 여러모로 격동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린다. 서로의 경험과 전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실재와 표상의 차이를 지적하는 자들의 모습과 겹친다. 그리고 충동으로 시작한 전쟁이 충격으로 끝이 났다. 이후의 삶은 어찌 전개될 것인가. 다행히 저자는 과정보다 이후를, 그러니까 너머를 보는 축에 속했다. 그는 나치 아래서 원폭에 대한 연구를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하며 넘겼고 전쟁이 지나간 곳에서 어떻게 학문을 다시 세울지에 대하여 숙고하였다. 이때, 현대에도 돌아볼 만한 실용주의적인 게 씌어있다. R&D에 관한 글들, 비과학도들의 선택이 연구에 비효율을 불러 일으키는 사례가 과학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게끔 만든다.
말하자면 하이젠베르크는 천재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대부분의 인물들 또한 그렇다. 자연과학에 능하고 범인은 쳐다도 보지 못할 곳에서 이론을 주무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꽤 인간적으로 보인다. 책 속에서 고민과 배움의 흔적이 역력한 까닭이다. 나는 그보다 알지 못하고 뒤떨어지면서도 왜 그리 고민이 부재하며 유레카의 순간들을 가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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