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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왜 이런가? 인생들은 왜 고통을 겪는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은 왜 이렇게 끔찍한 것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담담히 서술해나간다. 세 아들 미챠, 이반, 알료샤는 일반적인 세 부류의 사람을 나타낸다. 세상에는 미챠와 같은 세속적인 사람, 이반과 같은 무신론적 합리주의자, 알료샤와 같은 진정한 종교인이 있다.



이반과 알료샤가 만나 '대심문관'에 관해 대화 나누는 부분에서.. 이반은 몇가지를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은 3차원적 공간에 대한 지식밖에 없는 사람이고, 그것조차 완전히 알지 못하기에 신의 존재에 대해 확언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창조자로서의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세계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고통스런 모습 때문이다. 죄 많은 어른들끼리 서로 잘못과 폭력을 저지르고 상대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 그런데 어린 아이들은 왜..



별다른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왜.


전쟁터에서 군인에게 공놀이 하듯 던져지고 총칼로 꿰뚫어진 젖먹이 아기는 왜 그런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 친부모에게 짐승처럼 얻어맞고 학대당하며 변소에 갇혀 고통에 몸부림치다 신을 향해 구해달라는 기도를 올린 5살짜리 소녀는 왜 눈물을 흘려야 했나? 지주가 키우는 수백마리의 개들 중 하나의 다리를 다치게 했다는 죄로.. 발가벗겨져 사냥감 처럼 쫓기며 갈기갈기 찢겨죽은 농노의 8살짜리 아이는 왜 그런 고통을 당한 것인가?



"먼 훗 날 죄악이 사라지고 깨끗이 정화된 천국 같은 세상이 올 것이며.. 단지 지금은 그 중간 과정이라 하더라도 어린 아이들이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이러한 세상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료샤의 둘째 형 이반은 말하고 있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자칭하는 이들은 조심하자.


"그런 아이들도 원죄가 있는 죄인이니까요." 이렇게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말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린도 전서 13장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반은 착한 사람이다. 정이 많은 사람이다.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모르는 아이들의 고통에도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이들이 고통받는 이런 세상을 창조한 신에게 따져 질문하고 싶은 것을 친동생 알료샤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대심문관의 예화를 통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대해 말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을



세속화 된 로마가톨릭 체제에 대한 내부적인 개혁운동..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종교개혁의 주된 목적은 단지 세속주의의 경향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하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모습을 보면 우리 개신교인들이 반성해야할 부분이 참 많지만) 시작은 그러했다.



당시 로마가톨릭은 신앙생활에 있어 철저한 여러 규정들이 존재했고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등 7가지 성사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성도로서의 의무이며 7성사를 부정하면 파문당했다. 이러한 형식주의에서 탈피해 초대교회의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의 취지이다. 개신교에도 세례식, 성찬식은 있지만 그것이 구원을 위한 요구조건은 아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카라마조프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반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16세기 무렵 예수께서 다시 이땅에 강림하셨다고 가정하자". 그곳은 종교재판이 성행하던 스페인이었다.(로욜라가 창립한 수도회인 '예수회'를 염두에 둔 것 같음) 예수께서는 온갖 기적을 일으켰는데 그것을 지켜보던 대심문관 추기경은 호위병들에게 예수를 체포하게 시키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홀로 찾아와서 대화를 시도한다.



대심문관이 예수께 말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으니 당신은 말씀을 추가하면 안됩니다. 듣기만 하시오. 1500여년 전 당신이 이 땅에 왔을 때 당신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했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그러나 원래부터 반역자인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자유란 버거운 것이오. 감당하기 힘든 것이오. 인간이 진정 원하는 것은 빵과 기적이요. 자유가 아니란 말이오. 인간에게 양심의 자유는 괴로운 것이고 그보다는 평안함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인간이오. 그러므로 인간에게 행복감을 주려면 그들의 양심을 영원히 편안케 만들어주는 확고한 근거를 제공해야하오.



인간은 자유를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약하고 비열한 존재요. 예수께서 걸어간 그 길을 보통의 인간들이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오? 당신은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 하고 있소. 계시록에 의하면 당신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수가 각 종족마다 1만 2천 명씩이었다고 하는데 수가 그것밖에 안 된다면 그들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신에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소. 너무 적은 수요.



그렇다면



도대체 나머지 인간들은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런 위대한 인간들이 걸어간 길을 그밖의 약한 인간들이 참아내지 못한다하여 그들을 책망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그와 같은 무서운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여 연약한 영혼들을 책망할 수는 없지 않느냐 말이오.



대심문관은 이렇게 말하며 새로운 비젼을 제시한다.



우리는 예수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소수가 아닌 모든 사람에게 안식을 주려고 한다. 모든 인간을 하나의 개미집처럼 세계적으로 결합해야 세계적 왕국을 건설할 수도, 세계적인 안식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의 양심을 지배하고 그들의 빵을 손아귀에 쥐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자기들의 자유를 버리고 우리에게 복종할 때 그때야 비로소 그들은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설파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알료샤는 소리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자유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러시아정교의 해석이 아닙니다. 로마가톨릭 중에서도 가장 좋지 못한 종교재판의 심문관이나 예수회 회원 등의 사상이란 말입니다."



알료샤의 발언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대심문관은 성경에 기록된 '자유'의 의미를 곡해하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유는.. 인간들이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나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예수님 뒤를 따르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요한복음 8:31~36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머무르면 참 제자이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죄'에 묶여있는 결박을 예수께서 풀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결과로 닥치게 된 '죽음'이라는 운명에서도 벗어나게 된다는 자유이다.



크리스쳔이 믿음의 길을 걷는 것 또한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 요한복음과 로마서에 기록되어있다.



요한복음 16장 7절, 예수께서 승천하시면 크리스쳔들을 보호해줄 보혜사(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무엇으로부터의 보호인가? 죄로부터의 보호이다. 죄는 외부(타인)에도 있지만 우리의 내부(자신)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모든 인간들의 안에는 원죄로 인한 죄성(죄 짓고 싶어하는 욕망)이 존재하는데 이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성령께서 오신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인은 선한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 믿고 선해진 사람들도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마음 속은 죄와 성령이 싸우는 전쟁터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게 된 이후에는 오히려 생각적으로 더 힘들어 질 수 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했던 말과 행동에 브레이크가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 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자유란 이런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기 때문에 자유롭다. 나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야 하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계시록 7장에 나오는 '1만 2천'에 대해서도 잘못 해석하고있다. 이들은 '구원받은 자들의 수'라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한다. 7장 9절에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첫줄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은 왜 이렇게 끔찍한가?"



이에 대한 해답은 무엇일까?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가지 생각은 있다.



세상이 이런 이유는
죄악이 너무나도 깊고 넓게 퍼져있기 때문이며
우리 기독교인들이 '파 한 뿌리'를 열심히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도는 기독교인의 중요한 의무이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


(마태복음 22:3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