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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윗 세대가 아랫 세대에게 경험적 지식을 (권위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과거에는 일반적이었다.

2. 오늘 날에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2.1 1차 세계대전으로 기존의 경험적 지식들=통념들이 전부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2.2 전쟁에서 얻은 경험은 기존의 통념과 매우 반대되는 것이다.

3. 그 결과 우리는 경험을 잃어버리게 되고, 경험의 빈곤이 찾아온다.
3.1 이 빈곤을 틈타 그노시스, 심령주의 같은 이념들이 나돌고 있으나 이것은 기존 경험이 파괴되고 남은 잔재로 빈곤의 증거다.
3.2 인류의 경험 전체가 빈곤해져 야만성의 상태가 찾아온다.
3.2.1 그러나 이 야만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니다.

4. 야만 상태에서는 무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건축가들이 등장한다.
4.1 이 건축가들은 기존의 남은 통념들을 전부 없애버리고 새로이 시작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4.1.1 방법적 회의로 확고부동한 토대인 코기토 명제를 얻은 데카르트가 그러한 예시다.
4.2 이들은 해방적인 결과물을 내놓는다.

5. 결론적으로 경험의 빈곤은 기존 통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새로운 것으로 우리를 이끈다.
벤야민 특유의 변증법적인 능동적 허무주의가 잘 나타난 글이다. 나는 벤야민이 맑스의 핵심 구상을 가장 잘 계승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는데, 그 핵심 구상이란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변증법적인 의미에서) 논리적 귀결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운동한다. 그 운동은 공산주의를 향한다. (헤라클레이토스적인 맥락에서) 그러한 운동의 변증법적 법칙을 포착하는 것이 과학(Wissenschaft)이고, 그러한 법칙을 따르는 사회주의가 과학적 사회주의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독단적인 신의 관점도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핵심 구상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향한다 함은 자본주의가 자멸적인 운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창조적 파괴를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와 니체의 공통적인 준거는 바로 "파괴의 열정은 곧 창조의 열정"이라 말한 바쿠닌이다. 창조적 파괴를 위해서는 우선 그러한 파괴의 흐름이, 부정의 운동이 긍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새로움을 원하기에, 끊임없이 기존의 것을 파괴한다. 꿈을 통해서 꿈에서 깨어나기. 그러한 운동에서 진보적인 계기를 구원하고자 한 이가 벤야민이다.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포스트모던한 담론에 의해 헤겔적 거대서사에 대한 거부로 독해되곤 하지만, 역사철학테제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역사의 천사가 자신을 밀어내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자들을 계속해서 한데 모으고자 한다는 점이다. 벤야민이 그리도 부르짖은 억압받은 이들의 전통은 바로 거대서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벤야민이 제2인터내셔널의 기계론적 조류등을 비판한 이유는 — 물론 제2인터내셔널 내부에도 로자 등과 같이 그러한 경향에 반대하던 이들이 있었다 — 모든 계기를 진보적인 것으로 색칠해버린다면 진보적인 것과 반동적인 것의 구별이, 즉 진보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변화에서 진보적인 계기를 구원하기. 「경험과 빈곤」은 빈곤이라는 일면 부정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변화 속에서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계기를 인식하고 구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긍정적인 계기가 기실 체제에 대해, 즉 실정적인(positive) 것에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벤야민은 기계론과도 포스트모던 담론과도 구분되는, 변증법적 전통에 발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여기서 구조가 주체를 생산한다는 반헤겔주의자 알튀세르에게 기묘한 방식으로 — 마치 "이성의 간지"와도 같이 — 도달한다. 어쩌면 알튀세르는 어둠의 헤겔리안이 아니었을까?
작년에 블로그에 올린 글 좀 다듬고 내용 추가해서 올려봄. 정리 형식은 논리처락논고 좀 패러디했음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