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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갤도 혼란스러운데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지하철에 들어서며..
일을 마친 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빨리 집에 가서 쉬기 위해 헐레벌떡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역에 들어서자마자 지하철 도착 알림 전광판을 확인한다. 이전 역에서 내가 있는 역으로 지하철이 질주하는 것을 보고 후다닥 뛰어 열차에 탑승한다. 안락한 자리를 찾기 위해 어디보자, 오늘은 운 좋게도 끝부분에 자리가 있구나 덩치들 사이에 낑겨가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하곤 뒤로 맨 크로스백을 앞으로 끌러 착석한다.
책을 읽을까 가방을 만지작 거리다 오늘따라 왜 이리 피곤하지 이내 포기하곤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몇 정거장이나 갔을까 내 앞엔 희끗희끗한 어르신 한 명이 서있었다. 흠? 비켜줘야 하나? 근데 지하철을 비롯해 공공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왜 어르신들한테 양보해주라고 하는거지? 일종의 유교적 가스라이팅인가? 나는 나보다 30년은 더 많이 살아온 이에게 자리를 양보해줘야할 마땅한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것이 만약 유교적 이념에 따라 어른을 숭상하라는 뜻에서 나오는 자리양보요청이라면 그것을 비판없이 따르는 것이 온당한가? 요즘 독갤에 자꾸 유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에 대한 정보가 올라오던데.. 이 어르신이 굳이 자리를 양보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노인이 우대를 받아야 한다는 다른 유사한 개념에서 그 이유를 끌어와 유추해보기로 했다. 노인들이 국민연금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떠올릴 때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이 사람들이 후손세대를 위해 온갖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한 공적에 대한 보상이다라는 논리. 하지만, 이 사람이 진정 후손 세대를 위해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끌었을까? 이 사람은 단순히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일했을 뿐일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의 의도를 과다해석한 나머지 그가 한 결과만 가지고 자리 양보를 해줘야만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순수한 의도가 없었다면 이 사람에게 자리 양보라는 그 결과가 돌아가는게 합당한가?
아니, 근데 다시 생각해보자. 이 사람은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쾌락을 좇아 나이트에서 제비짓을 했을 수도 있고 왕년에 잘나가던 타짜였을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미아리에 돗자리깔고 손금이나 사주를 봐줬을 확률은? 아무틀 이런 경우라면 딱히 존경할만한 대상도 아니지 않은가? 이 사람의 전직은 무엇이였을까? 아니 자리 양보 하나 해주는데 할아버지 예전에 무슨 일 하셨어요 과거를 물어볼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한 일이였다.
그저 자리 양보를 받는게 과연 그에게 마땅한가 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왜 이렇게도 어려운지!
일종의 자리양보유예를 위해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어르신은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했었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덕의 상실> 니체냐? 아리스토텔레스냐?
니체는 기존의 도덕을 파괴하고 스스로의 도덕을 세운다. 하지만 진짜 니체가 자신의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니체 자신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마저도 뛰어넘는 그 무언가의 행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였을까?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위버멘쉬의 경지가 아닐까?
물론, 그 길은 주어진 것들을 충실히 따르는 삶들에 비하면 고되다. 기존의 것을 인식하고, 때려부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야만 하는 그리고 이 과정을 무한히 반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니체가 나에게 준 사고하는 방식은 대단히 필요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유용한 것이였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그와의 이별을 직감했다. 아니 외견상은 니체와의 이별이지만 실질적으론 그의 사상에 따라 모든 것들을 부수고 새롭게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자 니체를 뛰어넘는 하나의 시도로써였다.
모든 것은 주관적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고양하는 방향으로 충실히 이행해야할 것이지만, 적어도 최소한 남과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라면 그 삶은 단순히 자신의 삶을 고양하는 방법으로만 나아가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의 주관적인 도덕의 기준을 세우려는 시도가 종국에는 커다란 혼란을 그리고 실패를 겪을 것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뛰어넘어 새로운 위대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를 뛰어넘어야만 한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위대한 인간의 일환으로 자신의 덕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른바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저서들을 읽어야겠다는 맘을 먹었다. 그들의 성공의 바탕은 리더쉽임에 틀림없다. 어릴 적부터 즐겨읽던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와 조조의 리더쉽을 복기하며, 난 한동안 리더쉽과 관련된 책들을 탐독했다.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리더쉽 저서인 존 맥스웰을 비롯해 프랭클린 벤자민의 자서전, 미국 대통령들의 덕을 다룬 몇 권의 책들을 읽었지만, 공통적이게도 이들은 리더의 덕목들을 꽤나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 책을 쓴 사람들은 대체 무슨 기준으로 덕을 분류한 걸까? 이 덕들을 통해 이 사람들이 성공했다는 건 음 그래그래 잘 알겠군.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덕목들이 정말로 나한테 필요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남들이 정해준 덕목을 그저 따르는 것은 온 삶으로써 철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스승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덕의 상실>이란 책을 읽게 되었다. 나는 우리 회사 상사의 휑한 정수리처럼 텅 비어버린 도덕 영역에 대한 새로운 답을, 여러 대안들과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이 책을 읽었다. 저자 매킨타이어는 현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따라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진 이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세계가 아직도 유효한 것일 수도 있음을 입증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그의 최종적으로 무찔러야 할 도덕의 강호를 어지럽히는 현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최고의 성공러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저자가 제시하는 덕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한 개인의 삶은 이야기로, 이야기는 역사에 예속되며, 역사는 분절된 것이 아닌 연속된 이야기들의 집합이다. 우리는 역사란 공간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의 성격과 역할을 배우면서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인생은 우리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한편으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조연으로 활약한다. 그런 측면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의 이야기들과 삶 속에서의 가능한 행위는 이해가능한 것이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점에서 목적론적이며,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삶에 책임을 지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런 책임에 대한 설명은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와 네가 얽힌 우리의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고, 연속성이 분절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야기, 이해가능성, 책임가능성과 같은 요소를 어울러 통일성을 발견하고 이런 요소들을 통해 인격적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으로 그에게서 나오는 덕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세계가 현대 사회에서 어떠한 절대적인 합리적이면서 정합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그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현대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서 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덕의 목록에 정말 명확한 용기, 정의, 진실을 제시하는 것 이외에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전히 세계는 그 어느것에 의지하지 못하며, 바나나 나무 끝 나뭇가지에 매달린 아기 원숭이처럼 위태롭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적, 정치적 텍스트 속의 규범적인 전통을 옹호할 수 있는 합리적 경우를 과연 니체가 진정 깨뜨리고 있는가? 하지만,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버멘쉬는 자기 자신을 초월할지언정, 자신의 세계를 벗어난 어떠한 사회세계에서도 그에게 권위를 가지게 하는 객관적인 선을 발견하지 못했을뿐더러 누구도 그가 객관적 진리임을 말하지 않는다. 니체는 관계에서 그리고 활동에서 모든 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동정하는 마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인과 도구들을 원한다. … 그가 자기 자신에게 말하지 않을 때에는 가면을 쓴다. 그는 진리를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거짓을 말한다.’
선의 개념이 실천, 인간 삶의 통일성, 도덕적 전통을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면 선에 대한 공통적 유대를 맺고 있는 공동체에 진입하여야만 선과 덕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도덕적 유아론의 선고로 자기 자신밖에 있는 선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당연히 이긴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니체의 ‘매력’은 현대로 넘어오며 과거의 의미가 변질된 도덕에 겁먹지 않고 대항한 ‘위대한 인간’이라는 점이지만 불행히도 니체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대표적이면서도 가장 뛰어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도덕철학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관점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변하는 정합적 결론이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은 도덕적, 사회적 태도와 책무에 대한 이해가능성과 합리성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재서술될 수 있다.
나는 니체의 권력의지를 읽고 꽤나 실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매킨타이어의 설명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인간은 각기 다른 태생에서, 다른 환경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가지며, 다른 행위를 행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공통적으로 어떤 것에 대해 위대하다는 감정을, 인간의 숭고함을 느끼며 벅찬 감동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 순간을 마주한다. 그것은 인간이 허허벌판 속에서도 객관적으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의지할만한 무엇인가가 있음을 뜻한다. 그걸 찾는게 우리의 임무다.
달리기를 마치고..
나는 집에 돌아온 이후에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조깅을 했다. 거리는 가볍게 5KM, 오늘은 조금 더 빨리 뛰어야지하며 뛰어봤지만 괜히 힘들기만 하지 기록엔 특별히 변화가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움 속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그 할아버지는 과연 나와 동일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같은 거리를 뛸 수 있을까?
사실 단순히 생각하면 그가 나보다 몸이 불편했기 때문에 그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줄 이유는 충분했다. 칸트니 나발이니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리를 양보하기 싫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여러 철학자들을 끌어들이면서 온갖 생각을 하면서도 가장 단순한 삶의 원리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마땅한지에 대한 의문이였다. 그리고 설령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마땅하다 하여도 내가 누려 마땅한 그 몫을 누군가를 위해서, 특히 나보다 상대적으로 어려운 누군가들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선의 실천이자 덕의 실현, 그리고 나 자신의 완전함으로 다가가는 길이지 않을까?
유튜브를 보면서..
운동 후 침대에 드러누워 의미없는 유튜브 채널들을 넘기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몫을 포기하는 이들의 사연을 봤다. 너무나 유명한 이태석 신부를 비롯해 인천에서 후원을 통해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에게 밥을 나눠주는 민들레 국수집의 서영남 전 수사, 영리사업자지만 자신보다 힘든 사람들을 보고 자신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적자를 보먼서도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지어주는 금촌고시원의 오윤환 원장까지 왜 갑자기 이들의 삶이 내 눈 앞에 재현된 걸까?
착한 일을 하는게 별건가? 진정한 선이란 이유를 따져 묻지 않아도 굉장히 직관적이다. 그 선이란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의 몫을 내려 놓는 것. 그리고 특히 나보다 강자가 아닌 약자를 위해, 나보다 불편한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의 몫을 내려놓는 것. 설령 그 희생을 동정에 지나지 않는 후레한 감정에 기초한 것으로 취급하여 마뜩치 않다면 그것은 동정이라는 알량한 나 자신의 우월감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니다. 진정으로 남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는 나의 강함에서, 그리고 나의 몫을 시원하게 포기할 수 있는 넓은 아량에서 나오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생각에 다다른 순간 나의 인생은 변화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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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줄에 격하게 공감됩니다. 뭔가 분석하고 해체할수록 그 과정에서 먼가먼가인 이상한 주관들이 더해지고 더해져서 도리어 탐구를 대가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느낌이랄까? 더 이상 순수를 순수로 보지 못하고 그 행동의 기저에 깔린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꼬집고 밝히려는 세태도 점점 심해져서 살기 팍팍하고 험해지는 느낌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생각들긴함.
예를 들면 위에 언급한 유튜브에 달린 악플이나, 연예인 기부같은거?
근데 더 짜증나는건 사회가 점점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것 같으면서도 나 역시 그런 방식에 이미 찌들만큼 찌들었다는게 참 서글픈 일인거 같음.
그리고 이건 마찬가지로 다른 얘기일수도. 1박2일 강호동 얘기하니깐 떠오른건데 논산 훈련소에서 주간행군하는데 논산초딩들이 무슨 wwe슈퍼스타마냥 우리한테 하이파이브해주면서 달리는데 그때 진짜 기운나고 즐거웠음. 사람들의 천진난만함과 순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그런날이 또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래도 저런것들을 보고 들으며 새긴다면 언젠간...
이거 진짜 공감..
딕의 상상로 보고 들어왔는데 스크롤모임 - dc App
너 납치된거야
개인적으로 내용자체보다는 문장이 어렵다고 해야하나 꼬였다고 해야하나 여하튼 좀 읽기 힘들었던 책이였는데
이거 좋지.... 가다머, 매킨타이어 최애 철학자 ㅇㅇ 이거 좋았다고하니 자아의 원천들 추천도 많이 받았는데 그것도 읽어보길
이거 괜찮으면 아이리스 머독의 선의 군림도 괜찮다.
이거글 번역이좆같은건지 원문이좆같은건지 말을 좀 이해하기어렵게적어놔서 이해하기피곤햇던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