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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는 야만적인 근대(혹은 현대일까?)를 자주 상징하곤 한다. 홀로코스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물론이고, 소련의 굴라그에서의 현실을 폭로하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등은 합리적인 이상향이라는 소련의 그림자로서 여전히 남아 있는 폭력적인 야만을 폭로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현대 미국에서도 지젝이 몇 번이고 들먹이는 관타나모 수용소를 통해 나오기도 하고, 최근의 대규모 난민 사태에서 호주의 난민 수용소가 여러 인권 단체에게 비판 받으며, 소위 호모 사케르니 하는 그로테스크한 생명의 형태가 수용소가 암시하는 근대성의 섬뜩한 본질을 드러낸다고 하기도 한다.
반면 수용소의 역사는 어떤 침범할 수 없는 역사적 상징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홀로코스트의 수많은 수용소들은 모든 인권 담론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하지 말고 멈춰야 할 이유로서 굳건히 서 있고,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계몽의 변증법> 등의 글에서는 근대성이 내포하고 있는 합리성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예견할 수 없는 미래의 수용소행을 섬뜩한 예언조로 읊조리기도 한다.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에는 일상적인 세상과 야만적인 수용소 사이의 아분법이 있다. 아무리 우리의 근본에 수용소가 있다고 말한다고 해도, 지금 이 세상이 수용소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대륙의 한쪽 끝에는 도시가, 다른 한쪽 끝에는 수용소가 있다고 하는 말에 더 가깝다.
<숨그네>는 그런 점에서 특이하게도 아웃사이더에게 수용소와 도시, 양쪽에서의 경험이 본질적으로 균일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그려내는 소설이다. 화자는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에도 도시에서 자신이 붕 뜬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아마 이는 그의 동성애 성향과도 관련 있지 않을까) 수용소에서도 가족에게 받은 짧은 편지에서 자신이 이미 그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인상만을 받는다. 어느 정도 자기 실현적인 예언처럼, 그가 편지를 받은 후 2년 간 지켰던 침묵은 가족들이 그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애도해 그를 죽은 이로 만들도록 한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그는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경험이 자신의 옛 물건들이 자리잡은 머릿속에서, 이 집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사실 <숨그네>는 소재와는 달리 수용소 문학보다도 디아스포라 문학 같은 느낌을 풍기는 감이 있다. 2차 대전 전후로 일어난 대규모 민족 학살 및 대이동은 온 유럽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혔고, 예전부터 독일과 접하고 있던 경계 지역에서 전통적인 가정은 완전히 파괴되곤 했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자기들이 거부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곤 했고, 그 불일치는 자발적/반자발적 이주를 낳았다. 특히 그 민족성이 언어를 기반에 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숨그네>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바도 분명하다. 그는 수용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물건들에 집착하는 것처럼, 자신만의 단어를 만들어 품는다. 그의 머릿속에서 늘 맴도는 배고픈 천사, 심장삽, 숨그네 따위의 말들은 입 밖으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아마 그는 이 단어들이 그에게 갖는 의미를 남에게 설명해줄 의향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수용소에 끌려간 적 없는 이들은 수용소에서 나온 그를 포함한 수용소 출신 사람들을 이방인처럼 다룬다. 실제로도 그렇다. 가족 중 그가 동질감을 느끼는 이는 그가 나오기 전에 이미 죽어버린 할아버지 뿐이고, 자신이 없는 사이에 새로 태어난 동생을 그는 이 가정 속에서 자신을 대체해버린 무언가로 인식한다. 동생 역시 그를 일종의 물건에 가깝게 인식한다. 각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 역시 동일한 괴리감을 느끼며, 자신들이 그 경험이라는 수용소 속에 내적으로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여전히 수용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시의 가장 야만적인 곳에서 야만성의 세례를 가득 받고 나온, 자신들과 전혀 닮지 않은 야만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인식적인 베일. 이 새로운 수용소에서 과연 풀려날 수 있을지조차 기약할 수 없다. 갑자기 수용되었을 때처럼, 갑자기 내동댕이쳐지듯 도시 속에 새롭게 수용되었을 뿐이니까.
숨그네 추
글 좋다. 그리고 이 작품은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내용의 비극을 더 뚜렷하게 드러낸 점이 인상깊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