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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oi.org/10.18130/V39S01

https://www.ucpress.edu/book/9780520275164/ubiquitous-listening



이 글은 위의 두 책을 적당히 발췌해서 요약정리하고 내 감상과 뇌피셜을 섞어서 쓴 글이다. 두 책의 핵심적인 주제와 크게 다를 수 있고, 내가 심각하게 오독한 것일 수도 있다. 첫 번째 책에서는 에릭 사티의 일화, 브라이언 이노와 그 시대의 무작(Muzak)이라는 조류의 관계가 꽤나 인상 깊었다. 두 번째 책에서는 음악이 사실상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사회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꽤나 인상 깊었다. 이 두 책을 함께 보면서 꽤 흥미로운 주제가 생각나서 한번 써봄...



에릭 사티의 가구음악이나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는 음악적 이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자기 음악을 설명할 때 어떤 음악적 기법이나 형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어떤 개념이나 시대적 관행을 거스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듯한 뉘앙스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에서 일관적인 형식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형식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적합한 수단로서 채택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구 음악의 경우 사티는 당대의 음악회 관람 관행을 바꾸고 싶어 했다는 것 같다. 관객들이 숨까지 죽여가며 긴장된 상태로 음악을 감상하는 데 집중하는 관행을 고리타분하게 여겼는지, 사티는 관객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이야기를 나누며 음악회를 감상하는 그런 모습을 연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사티는 자신의 첫 가구음악을 발표할 때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음악을 마치 집구석에 있는 가구처럼 취급하고 듣고 싶을 때만 듣고 듣기 싫을 때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며 무시하라고 말이다. (물론 개같이 실패했다. 모든 관객이 작곡가인 사티의 말을 무시하고 빡집중해서 음악을 감상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가구음악의 목적은 특정한 이념의 실현이며, 음악적 형식은 적절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앰비언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앰비언트의 경우에는 브라이언 이노가 활동하던 떄의 무작(Muzak)에 대한 비판으로서 등장한 감이 없잖아 있다. 무작은 일종의 백그라운드 뮤직을 말하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중 음악이나 예술로서의 음악과는 조금 다른 산업적 목적으로 쓰이던 음악이다. 예를 들어 빠른 템포의 음악이 식당의 회전률을 높여준다~ 같은 이야기처럼, 음악으로 감상자에게 특정한 심리적 반응을 일으켜 산업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노는 무작의 도구적 성격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사티의 가구음악이란 이념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케이스로 보인다. 특정한 효과를 목적으로 하는 백그라운드 뮤직이 아니라 그저 음악으로서 백그라운 뮤직을 바랬던 것이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음악적 형식은 이노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채택되어 굳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일화만 생각해 보면 앰비언트 뮤직이 일종의 이념으로서 나름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에릭 사티의 시대에는 음악을 감상하려면 많은 음악가들이 직접 연주할 필요가 있었을테니 사회문화적 규범 상 한계가 있었겠지만, 이노의 시대와 우리 시대에는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음악을 틀어놓고 딴짓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실제로 많은 감상자들이 앰비언트를 틀어 놓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고, 나도 그렇게 감상해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앰비언트라는 이념은 꽤나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기술이 더더욱 발전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대는 이미 대-스트리밍의 시대로 접어 들었고, 그에 따라 음악을 소비하는 양식 또한 더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언제나 어디서나 노래가 흘러 나온다. 카페나 페스트푸드점 같은 가게는 물론이고, 거리만 걸어도 상가에서 틀어 놓은 노래가 들리며, 심지어는 뒷산에 산책을 나가도 아저씨 아줌마들이 핸드폰으로 틀어 놓은 뽕짝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스트리밍의 시대가 되면서 (특히 도시에서) 우리는 음악을 듣지 않는 것보다 뭐라도 듣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었다.



핵심은 이러한 유비쿼터스 리스닝의 세상에서 사실상 모든 음악이 가구음악이요, 앰비언트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어디를 가나 음악이 들려오지만, 사실 그게 무슨 음악인지 전혀 관심 갖지 않고 귀 기울여 듣지도 않는다. 물론 가끔은 집중해서 듣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순식간에 잊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사티의 이상향이자 이노의 지향점이 아니었던가? 



참 재밌는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에릭 사티와 브라이언 이노가 이념은 꽤나 그럴 듯하게 성취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이 아닌 과학기술로 성취되어 버린 것이다. 어이 없게도 앰비언트는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완성되고야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앰비언트의 이념이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게 정말 옳은 평가일까? 아니면 이념만 성공하고 음악인 실패했다고 보는 게 맞는 걸까? 



어느 쪽이 되었든 '앰비언트'라고 불리는 장르는 정체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장르의 정의를 살펴보면 분명해 진다. 백그라운드 음악? 감상자가 본인 의사에 따라 hear과 listen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음악? 이제 이런 정의는 완전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음악이 가구음악이나 다름 없게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제 앰비언트 음악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음악이 되고 말았다. 다른 장르와의 구별을 위해서라면 음악을 집중해서 청취하고 형식적 차별점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사티와 이노에게 음악적 형식이란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형식이야말로 장르의 본질이 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앰비언트라는 장르는 정체성과 목표를 잃고 어떠한 형식만 남은 신세가 된 것이다. 



물론 나는 앰비언트라 불리는 음악의 형식에 매료된 사람이긴 하지만, 사티와 이노의 야심찬 기획이 빛을 잃은 것은 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앰비언트 뮤직은 더 이상 특별한 장르가 아니게 되었다. 뭔가 다른 게 있다면 조금 잔잔하기 때문에 가구음악으로서 받아들이기 좀 쉽다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성격 마저도 이제는 그다지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세상이 변하니 음악도 함께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이노가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참 야속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