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헤겔의 체계를 진정으로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그 체계에 대한 지적인 자기굴복이라는 극단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싸잡아서 무조건 거부하는 극단 역시 피해가고자 한다면, 이제 남는 것은 그것을 오로지 내재적 비판을 통해 다루는 것이다…” (회슬레, 『헤겔의 체계 1』, 한길사, 62p)


0. 들어가며


회의주의와 사변의 필연성 — 헤겔의 『변증법과 회의주의』를 읽고 - 독서 마이너 갤러리 (dcinside.com)


이 글은 저 글의 중후반부가 될 예정이었던 글이다. 본문이 과도하게 헤겔에 집착하는 느낌이 든다면 저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1. 포이어바흐의 비판의 개요와 한계


(이 장은 일종의 요약이다.)


1.1. 헤겔의 체계


헤겔의 체계 구조는 논란이 많지만 내가 이해하기로 그것은 『정신현상학』에서 체계 자신의 정당화를 거치고 논리학 - 자연철학 - 정신철학의 삼분적 구조로 전개된다.


“그러나 학의 정의, 더 자세히 말해서 논리학의 정의는 오직 이 학이 출현하게 되는 필연성 속에서만 스스로를 입증한다. (....) 결국 여기서는 순수한 학의 개념과 그 개념의 연역이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보다 앞서서 저술된 『정신현상학』은 바로 그와 같은 개념을 연역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기 떄문이다. (...) 이러한 객관적 사유가 순수 학문의 내용을 이룬다.” (헤겔, 『논리의 학』, 자유아카데미, 42~44p)


그리고 이 세개의 학은 자기 내에서 원환적 구조를 가지고, 또 서로 원환적 구조를 가진다.


“철학의 각 부분들은 하나의 철학적인 전체, 즉 자기 자신 속에서 완결된 하나의 원환(Kreis)이다. (...) 그리하여 전체는 원환들로 된 하나의 원환으로 드러나며, 이러한 원환 각각은 필연적인 계기라 할 수 있다.” (헤겔, 『엔치클로페디』, 책세상, 제15절)


각각의 규정은 “I. 즉자대자적인 이념의 학문으로서 논리학, II, 타자 존재 내에서의 이념의 학문으로서의 자연철학, III. 타자 존재에서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이념으로서의 정신철학.”이다. (같은 책, 제18절)


그렇다면 헤겔의 방법이 사변인 바 헤겔은 사변적으로 각 학문의 이행을 이끌어내어야 할 것이고, 즉 『정신현상학』과 각각의 이행 즉 전개 그리고 결론에 사활이 달린 셈이다.


“그런데 이 중에 두 번째 단계라 할 수 있는 범주들의 ‘전개’는 출발이나 종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운 문제일 수 있다. (...) …’전개’의 문제는 일단 하나의 확고한 출발근거와 방법론이 확립되면 저자가 자신의 저술행위를 당분간 ‘사상의 본성’에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권대중, 『헤겔의 체계 1』, 「간주관성의 범주를 통한 헤겔 체계의 혁신」, 한길사, 15~16p)


그러나 헤겔에게는 유감스럽게도 포이어바흐의 지적은 그것이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게 하는 듯 한다.


1.2. 자연철학으로의 이행 문제


포이어바흐의 비판은 헤겔이 논리학의 결론인 절대이념에서 자연으로의 이행이 엄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념의 타재인 자연이란 감성적인 것으로 개념적으로 그리고 사변적으로는 제대로 다뤄질 수 없다. 헤겔의 삼분적 학문체계가 구체적이기 위해서는 자연철학이 그 만의 원리를 내함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논리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포이어바흐의 비판이다. 즉 논리학과 자연철학 사이에 변증법적 대립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논리학의 마지막에서 절대이념은 신학의 하늘로부터의 도래를 직접 기록하기 위한 애매한 결단으로 된다.” (포이어바흐, 『19세기 독일 사회철학』, 「철학의 개혁을 위한 예비 명제」, 민음사, 223p.)


물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포이어바흐의 비판은 감각주의에 어느정도 기초하기에 그것은 내재적 비판이 일정부분 당장은 아니고, 또 그러한 감각주의가 『정신현상학』의 감성적 확신 장에서 비판될 수 있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정신현상학』을 공격한다. 『정신현상학』의 시작점인 감성적 확신은 헤겔에 따르면 이미 보편자에 매개된 것으로 드러나는데, 포이어바흐가 보기에 이는 “보편자를 미리부터 실재적인 것으로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물론 증명되었겠지만, 감각적 의식에게는, 그런 입장에 세워져야 될 또는 그런 입장에 맞춰져야 될 우리에게는 .. …그렇지 않다!” (포이어바흐, 『19세기 독일 사회철학』,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민음사, 197p. 이하 페이지 수만 표시.)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정신현상학』은 이미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전제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동어반복이다. 따라서 이행만이 아니라 시작인 순수지도 문제가 된다.


(어떤 비트겐슈타인-헤겔주의자들은 헤겔이 하나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식의 “철학적 치료”를 개시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감성적 확신 자체가 다뤄지지 않았음은 변함이 없다.)


그렇게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체계를 내파하고, 감성적 존재, 즉 자연에서 시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1.3. 한계


그러나 포이어바흐의 감각주의는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자연을 아무런 매개 없이 경험한다는, 이른바 “소여의 신화”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요 문제로 된다. 맑스가 극복하려 한 것은 헤겔이 아니라 포이어바흐다. 아울러 이는 자연의 역사적 변화를 무시하여 자연이 추상적으로 된다는 슈티르너적 지적으로도 촉발된 문제의식이다.


“1.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 - 포이어바흐를 포함하여 - 의 주요 결함은 대상, 현실, 감각을 다만 객체 또는 지각의 형식으로만 파악하고 인간의 감성적인 행위로서, 실천으로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으며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돌베개, 121p)


그리하여 마르크스에게는 자연의 선차성, “객체의 우위”와 매개된 인식이라는 두 상반된 테마를 어떻게 조합시킬지가 문제가 되고, 이것이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양 저작에서 포이어바흐에 대한 태도는 조금 상반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자본』 또한 일차적으로는 이것의 해명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물질은 물질로서의 사회에 매개되어 인식된다는 것이 맑스의 결론이었다.


2. “학의 시초는 무엇으로써 마련되어야 하는가?”


(이 장은 본론의 1부에 해당한다.)


2.1. 순수존재는 가능한가, 혹은 보편자는 그 자체로 실재하는가.


“정신의 현상학으로부터, 달리 말하면 현상화되는 정신으로서의 의식의 학을 기점으로 하여 전제되는 것은, 이 의식이 도달한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는 곧 순수지라는 것이다. 바로 논리학이야말로 순수 학문이며, 광역화되고 확장된 상태에서의 순수지이다. (...) …순수지의 개념이야 말로 존재로 하여금 절대적 학문의 시원이 되도록 하는 근거이다. (...) 시초는… …그 어떤 것도 전제로 삼아서는 안된다. (...) 그러므로 시초는 곧 순수 존재이다.” (헤겔, 『논리의 학』, 자유아카데미, 69~70p)


매우 거칠게 『정신현상학』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므로 사유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한 사유인데, 무전제의 사유는 곧 무전제의 존재, 순수한 존재이고, 즉 순수 존재는 순수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얼핏 보면 걸고 넘어지기 힘들어 보이지만, 포이어바흐는 아예 근거, 시초 자체를 비판한다. 왜 학이 자체 내에 순수한 근거를 마련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시초의 개념은 더이상 비판 대상이 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참되고 보편타당한 것인가?”(179~180p)


포이어바흐는 그러한 시초가 사실상 불가하다고 말한다. 시초의 제시에 사유행위가 선행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순수 존재를 무규정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무규정함 역시 “사상규정”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물론 포이어바흐는 『논리의 학』이 그러한 모순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임을 안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결말에 가서는 철회된다. 존재는 참된 시초가 아닌 것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존재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절대 이념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절대 이념은 절대 이념이라는 동어반복이 아닌가?


거기에다, 순수 존재에 반대되는 것인 순수 무를 사유함은 가능한가?


“무의 사유는 자기 자신을 반박하는 사유이다. 무를 사유하는 자는 사유하지 않는다. 무는 사유의 부정이다. 따라서 무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짐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무는 그것이 사유되는 바로 그 순간에 사유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무의 반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는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동등성이다.> 그럴까? 하지만 단순성이나 자기와의 동등성은 실재적 규정들이 아닌가?”(205p)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다면 “...내게 우선 보편 개념들의 실재성을 증명해보라!”(190p)고 말한다. 즉 『논리의 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규정된, 순수한 존재 자체를, 존재라는 개념 자체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감성적 직관은 존재란 언제나 규정된 것이기에 순수한 존재란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헤겔은 이러한 감성적 직관을 미리 반박해놓아야 한다. 아니라면 “사변의 자기 자신과의 독백”(191p)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자 없는 존재란 없다는 아도르노의 하이데거 비판을 본다.)


2.2. 헤겔의 형식주의


포이어바흐에게 순수 존재에 대립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감성적인 존재이다. “감각적 존재는 논리적 존재를 부인한다.”(191p) 이러한 모순은 구체적으로 해소되었는가?


포이어바흐는 절대 이념이라는 개념에 이미 자기 증명이 들어 있기에 헤겔의 논리는 동어반복이고, 절대 이념은 절대 이념이라는 추상성이라고 말한다. “절대 이념이 타자로서 정립하는 것은 본질상 이미 다시 이념을 전제한다. 그래서 증명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193p) 진정한 증명은 절대 이념과 이념 아닌 감성적 존재자와의 합일이다. 그런데 헤겔은 그러한 존재자를 미리 추방하고 시작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러한 반론이 미리 반박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정신현상학』으로 넘어간다.


“헤겔은 사상의 타재 또는 일반적으로 이념의 타재로부터 이념이나 사상을 산출했는가? 한번 보자!” (195p)


2.3. 『정신현상학』의 동어반복


포이어바흐는 『정신현상학』의 감성적 확신 장이 감성적 확신을 이미 보편에 매개된 것으로 전제하고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우선 감성적 확신에 대한 헤겔의 말을 들어보자.


“최초에 또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대상이 되는 지는 그 자체가 직접적인 지, 즉 직접적인 것 또는 존재자에 관한 지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헤겔, 『정신현상학』, 아카넷, 93p)


이러한 직접적인 지가 감성적 확신이다. 감성적 확신은 “이것”, “지금”, “여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여기”, 이 “지금”의 지시체는 주변이 변하면 변한다. 그러나 “여기”, “지금”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다시금 자신이 매개된 단순성이거나 보편성임을 스스로 드러낸다.”(헤겔, 『정신현상학』, 아카넷, 97p)


허나 포이어바흐는 지시체가 실제적인 행동을 해야만 변한다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실재성을 입증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헤겔의 논리는 언어의 영역에서나 옳은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언어적 전회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언어의 영역에서만 갇혀있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포이어바흐가 혐의를 제기하는 동어반복이다. 감성적 의식에게 “여기”는 전혀 보편자가 아니다. 그런데 헤겔의 논변은 위에서 보다시피 “여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야, 그러니까 보편자여야 성립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이어바흐는 말한다:


“현상학적 여기는 내가 고정시키는 다른 여기와 어떤 점에서도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상학적 여기는 사실상 이미 보편자이기 때문에 역시 보편자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 헤겔이 반박하는 것은… …논리적인 여기이고 논리적인 지금이다. (...) 『현상학』은 오로지 현상학적 『논리학』일 따름이다-이 관점에서만 감각적 확신에 관한 장은 변호될 수 있다.”(197p)

즉 『정신현상학』은 전혀 감각적 확신에서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정신현상학』은 “사상의 타재가 아니라 사상의 타재에 대한 사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197p)


3. 자연


(이 장은 본론의 2부에 해당한다.)


3.1. 구체성과 객관


기실 피히테로부터 시작하는 독일 관념론을 이끌어왔던 것은 구체적 자기관계라는 테마이다. 이 특징은 심지어 마르크스에 이르러서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포이어바흐가 보기에 그것은 독일 관념론이, 아니 근대철학이 감각적인 것을 사상하고 주관에서 시작하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이다. 이러한 이념에, 특히 헤겔의 철학에 따르면 주관은 객관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객관은 주관에서 연역되어 나와야 하는데, 그 주관에서 연역된 객관이 어떻게 자기만의 구조를 가지고 주관과 구체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포이어바흐는 이를 사이비문제라고 보고, 처음부터 객관에서 시작하는 길을 선택한다. 포이어바흐가 보기에 객관, 감성적 존재자, 즉 자연은 처음부터 구체적이기에 주관을 산출하여도 주관은 구체적으로 객관과 관계할 수 있다. 자연은 그 자체 즉자대자적이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는 어떠한가? 헤겔은 자연이 이념 없이는 무력하고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규정한다. 헤겔에게서 자연은 자체적인 원리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자연이 이념의 소외이기에 그렇다. 자연은 이념의 부산물이고, 구체적이지 못하기에 자연과 주관이 관계를 맺어도 그것은 주관의 추상적 자기관계이다.


“자연은 타자존재의 형식으로 있는 이념으로 나타난다. 이념이 이와 같이 제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이고 자신에게 외면적이기 때문에, 자연은 이 이념에 대해서 단지 상대적으로만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면성은 자연이 자연으로 존재하는 규정을 이룬다.”(헤겔, 『엔치클로페디』, 나남, 제247절)


“개념규정들을 다만 추상적으로만 지니고 있으면서 특수한 것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외적 규정 가능성에 방치하는 것이 자연의 무력이다.”(앞의 책, 제250절)


여기서 문제가 되는 타재(Anderssein), 즉 타자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논리의 학』의 설명을 따르자면 “특정한 현존재에 생소한 규정을 가진 것이거나 혹은 현존재의 외부에 있는 타자로 나타”나는(헤겔, 『논리의 학』, 자유아카데미, 126p) 것이다. 헤겔의 사변철학은 앞서 설명하였듯이 구체적 자기관계, 구체적 동일성을 요구한다. 그것을 위해 이념은 이념의 타자로 이행하고 그것이 다시 이념으로 이행하여 구체적 동일성을 이루는 체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념이 타재로, 즉 “생소한 규정”을 가진 것으로 되어야 한다. 허나 헤겔의 자연은 “무력”한 것, 그 자체 원리를 지니지 않은 것이다. 헤겔의 자연은 『논리의 학』의 구조를 반복하여 진행할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헤겔의 자연은 진정한 이념의 타재가 아니라 이념의 타재에 대한 이념이다. 물론 타재를 어떻게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비철학을 주장한다.


더 자세히 다루자면, 타재는 외면적인 것이고 상호몰교섭적인 것이어서 그 자체의 역사와 다른 이념에 따른 구조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자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의 자연철학은 자연이 가지는 범주들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규정 내에서 이념의 발전의 체계에 따라 관념적으로 서술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이념의 충분한 외화가 아니다.


대안으로 포이어바흐는 다시금 『논리의 학』의 순수 무에 문제를 제기하며 무는 무의미이기에 존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어반복은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사유는 존재로부터 나오지만, 존재는 사유로부터 나오지 않”기에(포이어바흐, 「철학의 개혁을 위한 예비 명제」, 민음사, 223p) 구체적인 자기 관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일로, 주관과 객관의, 아니 객관과 주관의 통일로 인간을 제시한다. 즉 사유는 사유의 자기 인식이 아니라, 존재의 자기 인식인 것이다. 존재가 사유를 통해 존재 자신을 인식하고 구체적 동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철학이 현실에서 자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마르크스로 이어진다.)


객관과 주관, 존재와 사유의 이러한 비대칭성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보이며, 헤겔 철학 체계 내재적으로도 객관이 주관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근거가 있다. 구체적인 것에서 인간은 추상을 통해 추상적인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감성적 존재자를 인식하는 감성은 항상 감각할 타자를 필요로 하고, 또 감성은 언제나 구체적인 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에게는 감성이 곧 현실이다.


3.2. 한계


그러나 포이어바흐의 감각론은 한계를 가진다. 포이어바흐는 사변을 철학에서 완전히 때어놓고 결국에는 소박실재론으로 귀착하기에, 회의주의를 다시 부활시키고 만다. 사변철학에는 회의주의가 대립시킬 타자가 존재하지 않기에 회의주의는 무력해지나, 포이어바흐의 감각론은 그렇지 않다. 나아가 포이어바흐는 자연을 수동적으로 파악하기에 자연이 스스로 변화될 수 있음을 모른다. 『정신현상학』의 감성적 확신 장에 대한 반박은 유의미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모든 매개를 거부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를 완수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와 사회라는 지평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이 가지는 유동성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결합하려고 시도했지만, 잘 알다시피 경제학의 엄청난 규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본』의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포이어바흐의 기획은, 슈티르너의 기획은, 나아가 헤겔의 기획은, 피히테가 『지식론』에서 요청한 독일 관념론 전체의, 주객의 구체적 동일성이라는 기획은, 칸트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기획은 아직도 문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