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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외, 『조선후기 간척과 수리』, 민속원, 2010 정리
해당 책은 조선후기의 간척과 수리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우선 양선아는 조선후기 간척 사업을 특히 서해안 관련 간척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17~18세기에 이르면 연과 함께 보가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간척은 궁방 등 경제력과 간척 사업을 통한 이득을 노릴 수 있는 계층에 한정되었고, 다수의 비특권계층은 소규모 간척에 주력해야 했다.
송찬섭은 조선후기 진전개발에 대한 글을 썼다. 조선후기 진전개발은 16세기 이후 지속되었으나, 17세기 이후 인구 증가로 진전개발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진전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는 수리행정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또한 재정적 문제 역시 존재하였다. 조선 정부는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개간을 장려하고자 했으나, 이조차도 쉽지 않았다. 이에 송찬섭은 자본을 축적한 상인층이 유민을 활용해 적극적인 서해안 개발에 나섰다. 수리 시설의 발달은 자본의 축적과 수리시설의 사유화로 인한 투자 욕구, 18세기의 기술적 발전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노동력은 특권층은 부역을 통해 노동력을 충당했고, 또한 임노동 형태의 노동력 충원 방법도 있었다. 이러한 진전의 경영 형태는 죽보, 혹은 입안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이러한 진전의 개간 과정은 지주층의 소유지 확대로 이어졌으나 그 속에서 지대의 감하나 전매, 소유의식 강화 등도 나타나고 있었다.
정윤섭은 해남윤씨가의 해언전 개발을 주제로 글을 썼다. 해남윤씨가는 지역 명문 양반가로 16세기부터 양반 가문의 인맥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국가에서 권장하고 있었던 입안을 통해 해언전의 소유를 늘려갔다. 17~18세기 경제의 발전을 통해 해언전 개간을 늘릴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노비뿐만 아니라 고용노동을 활용하기도 했다.
염정섭은 조선후기 수리시설에 대한 글을 작성했다. 조선후기의 국왕들은 수리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도 절목과 사목을 통해 수리시설 관리의 책임을 지방관들에게 넘겼다. 조선후기에는 제언과 보 등의 수리와 확충 등의 논의가 늘어났고, 정조 말의 응지상소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제언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었고 따라서 물을 쓰는 문제로 논쟁도 잦았다. 또한 인구증가로 화전이 증가하면서 수리 여건은 악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제언은 삼남 지방 그중에서도 특히 경상도에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최원규는 수리시설과 경영에 대한 글을 작성하였다. 조선 전기부터 수리 정책은 주요 의제였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중요성이 더욱 커졌고, 이는 정조대의 제언절목으로 나타난다. 수차의 경우 기술적 문제로 도입 논의는 활발했지만 정조대에 현실화되지 못했다. 제언은 이후로도 신축과 폐기를 반복하며, 농민들의 농업 생산력 발전 욕구를 알 수 있었다.
또한 보 역시 이앙법의 발달 이후 중요한 수리 기구 중 하나였는데, 이 역시 사목에 그 중요성이 언급되며, 조선후기 삼남 지방의 보 발달 양상도 확인된다.
수리시설의 경영은 궁방 등 특권층뿐 아니라 향촌사회의 사족이나 재력을 겸비한 상인 등 다양하였다. 이들은 부역뿐 아니라 임노동을 통해 노동력을 충원하였으며, 사적 소유지와 자본 축적 확대를 꾀했다. 또한 수세의 징수를 통해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이 같은 수리시설을 두고 수리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이민우는 수세의 징수와 수리시설 사점에 관한 글을 작성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개인이 축조한 수리시설은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공유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불법적 사점은 적지 않개 이루어졌다. 그러나 16세기까지는 경작지로 사용하기 위한 사점이 대부분이었고, 17세기부터 수리 시설을 원래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사점이 등장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궁방과 아문이 토지개간을 이끌었고, 경제적 성격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들은 수리 시설을 통해 수세를 거두며, 자본을 축적했다. 그리고 수세 징수는 18세기 이후 일반화되었고, 19세기에는 수령에 보호 아래 사점이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권세가들의 수리시설 침탈과 수세 징수로 인한 갈등, 이로 인한 농민층의 저항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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