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들뢰즈와의 인연은 대학 새내기 시절 <안티 오이디푸스>를 접하고서였다. 그땐 정신분석이니 철학이니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무모함으로 돌진했다. 그 결과 책 읽기를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변명을 하자면 당시 그 판본은 번역 문제로 이야기가 많았다. 이후 빨간색 표지의 벽돌 책 <천 개의 고원>이 나타났다. 물론 이후에도 등정은 실패로 끝났다. 현대철학을 아는 척하고 싶은 겉멋이 많았던 시절의 아픈 상처이다.
들뢰즈의 주저는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인데 불구하고, 굳이 후기작에 가타리 조합을 거쳐 난해함이 더해진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들뢰즈를 이해하려면 합리주의 칸트와 경험주의의 흄을 기본으로, 정신분석의 프로이트와 라캉을 경유하고 반철학이라 불리는 니체와 스피노자, 베르그송까지 섭렵해야 한다.
/
초월론적 경험론이란 경험론 철학을 통해 행해지는 초월론 철학을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들뢰즈는 초월론적 영역을 순수하게 그려내려고 한다. 그를 위해 무인도와 타자의 이론에 의해 그 원광경이 그려지고, 자아도 통각도 의식도 전제하지 않는, 참된 초월론적인 발생소로서의 사건이 발견되었다.
/
지금도 그를 이해할 준비가 완벽히 된 것은 아니지만 입문서를 읽을 아량이 생긴 나로서는 이 책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들뢰즈에 대한 오해는 자유간접화법에서 비롯된다. 언뜻 표절 같아 보이는 이러한 들뢰즈 특유의 문법은 그가 분석한 다른 철학자의 목소리와 그의 목소리의 구분을 없앤다. 당연히 가타리와의 공동 저서에서 둘 사이를 구별하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다만, 가타리의 장문의 메모를 바탕으로 재해석해 같이 퇴고해서 글을 완성했음을 알 뿐이다.
/
그러면 자유간접화법이란 무엇인가? 말해진 내용이 도입된 것을 지시하는 표지가 없는 채로 묘사에 도입되어버리는 화법이다. 앞의 예를 좇아 말하면, "ce n'était pas vrai"("it was not true"/"그것은 틀렸다가 인용부 없이 그대로 문장 속에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틀렸다"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은'그'이지 화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화자가 그것을 보고할 때에 사용해야 할 표지("Il a dit que"/"He said that"/"그는 ⋯⋯라고 말했다)가 없는 채 말해진 측의 판단이 거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화자의 판단인 듯이.
/
들뢰즈에게 있어 질문은 정답보다 중요하다. 질문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는 칸트의 선험성(아프리오리)를 흄(경험주의)이라는 장대높이로 뛰어넘는 시도이다.
/
철학자에게 사유를 강요한 어떠한 질문. 그 철학자 본인에게조차 명석하게 의식되고 있지 않은 그 질문을 그려내는 것, 때로는 그 철학자 본인이 의식해서 개념화한 것도 아닌 '개념'마저 사용해서, 때로는 그 대상을 논하기에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주제 topic를 뛰어넘는 것조차 꺼리지 않고 그 질문을 그려내는 것, 들뢰즈는 그것이야말로 철학연구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
들뢰즈는 무인도에 로빈슨 크루소처럼 한 명이 입도한 경우에는 여전히 무인도라고 한다. 왜냐하면 타자가 없기 때문이다. 타자의 존재는 지각을 보증하는 매개체이다. 이를테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그를 목격한 제자가 없다면 존재조차 인정할 수 없다.
/
이상으로부터 타자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수 있다. 타자란 그것 없이는 지각이 기능할 수 없게 되는 "지각영역의 구조structure du champ perceptif"이다. LS. p.357). 바꿔 말하면 대상의 대상성을 보증하는 구조이다. 타자는 지각영역에 있어서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자가 없으면 지각영역 그자체가 따라서 대상의 대상성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타자야말로 대상의 대상성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 타자를 뺀 곳에서는 무릇 자아라는 것을 상정하기가 불가능하다.
/
들뢰즈에 의하면 흄의 경험론을 관통하는 질문이란 '정신은 어떻게 하나의 주체로 생성하는가?"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묻기를 그만둬버린 질문에 다름 아니다. 들뢰즈에 의하면 "초월론적 탐구의 특징은 여기서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그만둘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PSM. p.98). 그렇지만 초월론 철학의 칸트적 운용은 어떤 지점에서 필시 어떤 것을 두려워해서) 그 탐구를 그만둬버린다. 들뢰즈는 그것에 비해 경험론 철학의 도움을 빌려 초월론 철학의 탐구를 끝까지 밀어붙이려고 시도한다. 여기서부터 들뢰즈는 주체는 고사하고 자아도 상정하지 않는 상태(무인도)로 거슬러 올라가 사건이라는 이름의 특이성만을 초월론적 요소로서 발견하고, 나아가서는 초월론적인 원리 그 자체가 발생하는 모습을 그려내는데 이르렀다.
/
실패를 지향하는 것처럼 사유를 지향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이데거의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주장하는 표상과 사유의 대립을 뛰어넘는다. 애초에 질문이 잘못된 것이다.
/
그러나 실패를 지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패는 지향하는 순간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점은 그대로 사유 이론으로도 되돌아올 것이다. 사유는 만남에 의해 강제되어 비로소 생겨난다. 따라서 사유하는 것을 지향함은 불가능하다.
/
우리가 흔히 ‘사유’라고 말하는 것이 실은 사유가 아니라 단순히 ‘표상작용’(Vor-stellen)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과감한 주장이다. 말의 뿌리를 분석해보면 표상작용이란 ‘앞에’(Vor) ‘세운다’(stellen)는 뜻이다. 무엇을 앞에 세운다는 것인가. 자연과 환경을 비롯한 존재자(존재하는 것) 전체를 끌어다 앞에 세운다는 말이다. 인간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자신이 설정한 규칙과 목표에 짜맞춰 세워놓고 그것을 관리하고 통제하고 수탈한다. 과학과 기술이 그 표상작용의 한 결과물이다. 근대인이란 말하자면 이 표상작용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존재인데, 이때의 표상은 의지 혹은 의욕과 같은 말이다.
한겨레, 2005.3.25
/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을 통해 프로이트 혹은 라캉의 오이디푸스 삼각구도를 비판한다. 따라서 부모, 남근(팔루스)과 관련된 성적 욕망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
훗날 <안티 오이디푸스>는 '결여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욕망의 복수성을 주장하게 된다. 그 싹이 여기에 있다고 말해도 좋다.
/
그러면 이렇게 해서 반복에서부터 억압을 설명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억압의 존재는 인정해도(그것은 항상 치료 과정에서 확인된다), 원억압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반복이 억압을 낳는 것이라면 최초의 기원적 억압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
그들의 최초의 저작이 '반오이디푸스'라고 명명된 것의 의미도 이것으로부터 명백할 것이다. '원억압'이야말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핵심에 있는 교설이다. 이 책이 정신분석에 대치하는 형태로 제시한 '분열분 석schizo-analyse'도 또한 여기서부터 특징지을 수 있다. 정신분석은 원억압의 가설을 기초에 두고 분석을 행한다. 분열분석은 원억압의 '정상적 작동 그 자체를 의심하고 분석을 행한다.
/
그렇다고 그가 정신분석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의 문법으로 욕망이론과 정치적인 들뢰즈를 만날 수 있다. 그가 정치적인지 순수한 철학자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
시니피앙(법, 규칙)과 시니피에 (그 적용 대상) 사이에는 반드시 불균형이 존재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이 불 균형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동인이다.
/
아래의 대립항은 종교를 정치로 변신시킨다. 정치인으로서 예수.
/
무리의 마음에 대립하는 것이 '개인의 마음ame individuelle'이다. 무리의 마음은 주지 않고 그저 오로지 얻으려고 한다. 이에 비해 개인의 마음은 무엇도 받지 않고 단지 주려고 한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파트모스의 요한이고, 후자를 대표하는 것이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기획은 개인적인 것이었다"(CC. p.52).
/
들뢰즈는 구조주의자(로 불리기 싫어하지만 그렇게 불리는) 푸코를 통해 그의 공산주의 이론에 빚진 권력의 이원론을 극복한다. 즉, 권력은 이차원이 아니라 다차원적이다.
/
그리고 권력관계의 다이어그램이라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지는 도식이 이것을 통합해낸다. 푸코의 분석은 어디까지나 다양체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결론이다.
/
담론적 편성과 비담론적 편성, 즉 말과 사물, 언표와 가시성, 언표 가능 한 것과 가시적인 것. 언어와 빛, 말하는 것과 보는 것.... 그러한 두 체제와 이 체제들을 움직이는 권력과 앎이라는 두 힘. 푸코의 사고는 확실히 이원론적이라고 생각된다.
/
푸코는 권력 이론을 누구보다 정교하게 발전시켰으나, 갑자기 <성의 역사>로 넘어가버린다. 그가 가진 한계는 들뢰즈를 통해 권력이 욕망으로 대체된다.
/
특정 권력양식이 특정 욕망의 배치를 전제로 하고 있음은 그 권력이 어떤 이유에서 사람들에게 욕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주형 권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군주형 권력에 의한 지배가 욕망되어야만 한다. 기율 형 권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율의 지배가 욕망되어야만 한다. 통제 사회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기율이 아닌, 체크 포인트형 관리방식에 의한 지배가 욕망되어야만 한다.
/
라이히는 왜 사람들이 자발적인 노예가 되길 원하는지 반문했다. 들뢰즈는 그걸 원한다고 답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경제적 자유라는 복권 당첨을 꿈꾸며 월급을 받는 노예의 생활에 만족한다.
/
즉, '왜 사람들은 흡사 자신들이 구원받기 위해서이기라도 한 듯이 자진해서 종속하기 위해 싸우는가'라는 문제 말이다. (중략)오히려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도둑질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착취받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파업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들뢰즈는 만년의 저작 <천 개의 고원>을 통해 인류 역사상 국가가 없는 사회는 없었으며, 별도로 국가와 양립하는 '전쟁 기계'라는 개념을 세운다. 나아가 화폐는 자본가가 아닌 국가를 위한 것이다.
/
"원시공동체의 자급자족, 자율성, 독립, 선재성 등 은 민속학자의 꿈에 불과하다. 원시공동체가 필연적으로 국가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국가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중략)
구석기 시대나 원시 사회에서 '국가 없는 사회' 를 보는 것은 근대에 절망한 연구자들의 꿈을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중략)
화폐는 국가라는 포획장치가 세 징수의 공통척도로서 만들어낸 것이다.
/
이 책은 입문서인데 마냥 쉬운 책은 아니다. 그래도 들뢰즈의 텍스트와 마주하기 전 스파링 파트너로는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푸코 소개에 큰 비중을 둔게 좀 흥미로웠음
일본이 푸코 좋아하는 듯. 야전과 영원의 사사키 아타루도 그렇고. 너무 지나친 비약일 수 있겠지만.
야전과영원에서는 푸코에 대한 보론격으로 들뢰즈 끌고와서 한참 떠드는거 보면 둘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건가 싶기도 ㅋㅋ..
재밌는데?? 철학좆밥이긴 한데 읽어볼만하려나
입문서이긴 한데 진짜 뉴비라면 간단한 철학사 정도 읽고 읽는 것을 추천함.
본문은 대강 이해되는데 그럼 읽어도 되려나? 칸트가 흄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는지 이런건 대충 아는데 프로이트 라깡 이런건 자세히 모름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 입문(본인이 대중강연한 책), 라캉은 책이 완역이 없다고 봐야(에크리는 오역이라는 평) 하므로 세미나 일부를 강독한 책이나 라캉 입문서를 읽으면 될 듯
라깡 입문서 추천할거 있음??
프로이트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정신분석 강의 괜찮나
슬라보예 지젝이 쓴 HOW TO READ 라캉, 난 전문가는 아니니 참고만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