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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처음에는 아름다운 글이다 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반전에 매혹되었다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ㅤ이 책에서 불행하게 묘사된 사람은 많지만(스탠포드 부인, 강제 불임 시술을 받은 이들 등) 저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나름의 형태로 애도가 있었다고 생가합니다.


ㅤ제가 가슴 아팠던 대상은, 그러한 애도가 없었던 우리의 주인공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었습니다. 그의 인생, 그리고 그의 명성의 붕괴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그의 국선변호인이라도 되고 싶을 정도로요.


ㅤ그가 살인자인지 아닌지. 뭐 그런 이야기는 차치하겠습니다. 저는 인식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 없는 것을"

- "로미오와 줄리엣(W. 셰익스피어)" 中


ㅤ우리는 사물을 어떻게 볼까요. 그냥 우리 망막을 통해 자연스럽게 뇌를 통해 보는 것일까요? 하지만 사실 사물은 분절적이지 않습니다. 자연 즉 모든 시간, 장소, 사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나눠서 봅니다. 나눠서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나눠서 인식하게 하는 최소한의 인식 구조가 우리 뇌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인식 구조. 그것을 패러다임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인식 구조 없이 보는 행위는 딱히 판단이 이뤄지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냥 관찰에 불과합니다. 흰색이 무엇이고, 하늘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의 관찰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동물의 외부 세계 인식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봐도 무엇인지 모른다에 가깝습니다. 시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이름 붙이기 전에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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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된 세계는 외부의 다른 기만하는 존재에 의해 결정 된다기 보다는 우리가 자체적으로 부과한 환상이다.

- "순수이성비판(이마누엘 칸트)"


ㅤ우리 인간은 선사 시대부터,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려 했고, 볼 수 없는 것을 보려 했습니다. 당연히 그러한 행위는 계속 틀려왔습니다. 간단히 '바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시시대의 바지와 로마시대의 바지, 중세, 그리고 현대의 바지의 개념은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그냥 우리가 그렇게 통용해서 쓸 뿐이지, 이 시대마다, 각 문명의 바지는 사실 공통점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의 입니다. 우리가 "바지"를 그렇게 바라보기로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ㅤ바지의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러면 자연계 이야기를 해볼게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던데, 동물은 어떨까요? 아니면 파충류는요?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측계통군의 정의에 따르면) 위의 개념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 맞다 버섯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ㅤ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한 게임의 법칙 위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바로 현대의 "분류학"이라는 게임입니다) 다른 시대, 다른 세상. 당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는 물고기가 여전히 헤엄치고, 우리는 동물이고, 파충류가 자라납니다. (버섯은 맛있고요)


ㅤ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즉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는, 그것이 허구의 것일지라도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과학의 세계에서는 "가설"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반증되면 폐기되고, 반증되지 않으면,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설일 뿐입니다. 영원히 남는 이론은 없습니다. 이 책이 큰 빚을 지고 있는 다윈 조차도 그의 그 유명한 책에서 겸손하게 적었던 이유입니다.


다만 신뢰도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이 믿어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늘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였지만, 잘못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 “종의 기원(찰스 다윈)" 서문 中


ㅤ저자의 말(논리)대로라면,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물고기가 존재하는 세상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룰루가 조던에게 사용한 상대주의적 해체는 그 자신과 자신의 책에도 통용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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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ㅤ저자의 말대로라면 우생학이 맞을 수 있는 세상, 조던이 냉혹한 살인마가 아닐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현대 인류가 지금 지니고 있는 생각들, "낙태", "연애결혼", "평등", "무신론"... 이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다 100년 전으로만 가도 광기의 아이디어들이었던 것처럼 무언가 확신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거 같습니다. 비단 역사성에 기대지 않아도, 추상적 개념은 다 이런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족", "국가", "사회", "회사"...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김구는 민족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한 평생을 바친 연쇄살인마가 됩니다).


ㅤ과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동설이 틀렸다면, 갈릴레오의 지동설, 더 나아가 뉴턴 역학도 상대성 이론 이후에는 틀린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은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역사의 법정"이라는 것입니다.

(상대성 이론도 양자역학에 의해 반박되어 이 법정에서 재판 중입니다. 아마도 조만간 두 이론을 포괄하는 새로운 이론이 필요할 것입니다)


천동설을 배척하고 지동설을 확립했을 때 갈릴레오나 뉴튼은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절대적으로 무엇이 정지해 있고 무엇이 움직인다는 기준이란 없으며, 지동설의 이론적 모델이 더 간단할 뿐이지, 천동설에 따라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해도 완전히 틀린 설명은 아니다.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장하석)" 中


ㅤ하지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가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냉혹한 판사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던의 아이디어에 영향 받은 이들이 이들이 낙태와 불임 시술을 통해 특정 유전자를 말살 시킨 것처럼, 룰루는 그의 책을 통해 조던을 기록말살형에 처합니다. 조던의 이름을 딴 건물들은 이제 두 대학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는 이제 반전주의자, 노예 해방주의자, 존경받는 분류학자에서 인종차별주의자, 나찌와 같은 반인권적 파시스트, 무엇보다도 살인마로 기억되게 될 것입니다.


ㅤ저는 지금 물고기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저녁에는 광어회를 먹으려 합니다. 차이를 무시하고, 공통으로 묶으려는 (어쩌면 폭력적일) 행위를 넘어, 작은 것들 하나하나 들여다 봐야 한다는 룰루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것을 조던은 어류에 이름 붙이기라는 행위를 통해 평생에 걸쳐 해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넓게 보면 그 둘의 관점이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까지 포함하면 우리 셋,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는 우리 존재를 넘어서서 판단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규정짓고 있는 시간, 장소,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중력처럼 우리의 몸을 사로잡습니다. 우리는 틀릴 수 있습니다. 아니 아마도 틀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ㅤ해변가에서 몇 시간 뒤 무너져 내릴 모래성을 쌓아올리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패러다임, 관점, 이론, 가설 등등 으로 불리우는 우리만의 성을 쌓아올립니다. 아이에게 몇 시간 뒤 무너질 걸 왜 쌓니 라고 물으면 아마도 “재밌어서요”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곧 무너질 것들이라고, 의미 없는 것들일까요. 다만 저는 어떻게든 기댈게 필요했을 뿐입니다. 저는 그저 인간일 뿐입니다.


이제까지 내 생명을 지켜주신 분이시여,

나는 아무 물에나 힘없이 붕괴하는 모래탑입니까?

이제 불켜진 집에 돌아가게 허락해 주십시요.

고통이신, 그리고 사랑이신

적막한 황혼의 하나님이여.

- "완전주의자의 꿈(장석주)" 中


ㅤ그것이 룰루가 그리고 또한 조던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밤을 잃은 도시와 하늘 앞에서

당신도 나도 똑같이 작은 사람이에요

-“도시의 밤(김현식)”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