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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문구가 참 놀라운 책인데, "최고의 마케팅 교과서"라느니 "MZ세대 (...)의 숨은 퍼즐"이라느니, 아마 이런 걸 원하고 읽은 사람에게는 좀 과하게 어려운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확실히, 지금이든 언제든 몇 번이고 읽히며 인용될 것 같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다양한 집단에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적 병폐의", "퇴폐적인 신세대의", "PC주의에 과몰입하는", "꾸밈노동을 강요하는" 현대 등등에 대한 더 적합한 설명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이 분석들이 그리 올바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씁쓸한 설명이었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우리가 들어선 후기 근대 사회는 이 모든 것들을 낳을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우리가 이런 것들을 긍정적으로 여기게끔 진화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분석의 세부 사항을 정리할 수는 없으니, 여기에서는 최대한 중심적인 뼈대만을 모아보도록 하겠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막스 베버의 "탈신비화" 테제를 기반으로, 근대는 세상을 합리화해 모든 것을 효용성 기준으로 보편화하고, 규격화하며, 그렇게 맞춰진 양산품들은 근대의 기술에 기반해 세상을 뒤덮는다, 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사회에서 무언가는 보편-특수의 관계에 있거나, 특이성을 갖게 되는데, 보편적인 개념 중 하나에 속하는 특수한 개체 하나거나, 애초에 그런 보편성을 전혀 갖지 못하는 (부정적으로) 특이한 무언가라는 식으로 말이다. 후자를 잘 보여주는 예시는 범죄자 및 정신병자의 특이성인데, 이들은 일반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취급 받았고, 그 특이성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범죄자의 프로필은 아이러니하게도 후기 근대에는 각각의 개인의 "단독성"을 보여주기 위한 긍정적인 도구가 된다.



저자는 이 테제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함께 보지 않는 낭만주의와 예술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보편화는 동시에 보편화에 반대하는 "문화화"를 낳는다. 합리화에서 모든 것들을 한데 묶어 비교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하는 것과는 달리, 예술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문화화는 각각의 대상에 서로 다른 대상과 비교될 수 없는 어떤 내재적이고 단독적인 가치, "단독성"을 찾는다.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의 음악이 위대한 것은 당연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 진정으로 위대하느냐, 하는 질문이 그리 의미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대로 어느 한쪽이 전혀 가치가 없다고 주장할 수는 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태생적으로 공급 과잉의 상태에 늘 있던 예술 시장에서 이 단독성의 추구는 극소수의 승자가 모든 영광을 독식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완벽하게 잊히는, 승자 독식의 격차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의 이야기로 돌아가, 이 시대의 비슷하게 유명했던 작곡가 중 누구를 아는가?)



후기 근대 사회에서 합리화와 그 기술은 보편적으로 양산되는 공산품들을 온 세상에 확산하는 데에 (거의) 성공했다. 이러한 공급 과잉의 배경에서 68년도에 시작된 "대항 문화"는 기묘한 반전을 일으켰는데, 그저 기술적 효용을 제공할 뿐인 공산품에는 딱 그만한 가치 밖에 없지만, 그 이외에 무언가 진정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예술적"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그 이후 놀라울 정도로 높아진 고학력자의 비율 덕에 이러한 문화적, 지적 배경을 가진 "신중간계급"의 후기 근대 사회가 시작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전반적으로 일컫는 말로 "사회의 문화화"라는 말을 쓰지만, 나로서는 사회의 예술화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과잉>에서도 몇 번이고 지적하지만, 근대의 예술 시장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미 후기 근대 사회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이 흐름 속에서 80년대부터 시작된 후기 근대 사회는 분명히 온 사회가 예술적인 척도로 판단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사회의 문화화는 트릴링의 "진정성Authenticity" 개념과도 맞물리며 객체나 주체, 그리고 사물이나 사건이나 그 밖의 여러 것들에 대해 진정성 있는 가치를 찾도록 요구했다. 이것은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인가? 그저 돈이나 벌려고 찍어낸 양산품 중 하나에 불과하지는 않는가? 어디에나 있는 공산품들은 대부분 그저 효용성만 있는 무가치한 깡통이 되었고, 개중 일부분은 어떤 문화적 상징, 혹은 진정성 있는 예술 '상품'으로서 단독적인 가치를 부여 받았다. 여기에서 문제는 그 단독성의 가치가 (예술이 보여주듯) 사실상 물질적인 근본과는 거의 무관한, 사회적이고 정서적인 가치라는 점이다. 이는 그렇기 때문에 매우 우연적으로 부여되며, 극소수만이 모든 것을 독식하게 되는 단독성들의 시장에서 미래의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처참하게 완벽히 어둠 속으로 내려앉거나, 반대로 단 하나의 성공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다.



후기 근대 사회에 대한 합리화의 기여는 이뿐만이 아닌데, 근대의 단독성 시장인 예술 시장과는 달리 후기 근대의 단독성 시장은 서열화될 수 있다. 판매량이나 인기도 등을 통해 매긴 순위표는 이후에 이 시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그 단독성의 가치를 판단하는 나름의 도움 잣대가 되어주며, 순위표 내에 들어오지도 못한 대부분의 것들에게 단독성을 부여받기 위한 최초의 관문, 주목은 이뤄지지 않는다. 실제로 한 예시를 들자면, 대중 음악에서 이런 단독성의 시장을 잘 보여주는 Rate Your Music 웹사이트에서 예전의 재즈 음반들은 다소 선택적으로 순위에 들며, 한 번 순위에 든 재즈 음반과 그런 적 없는 재즈 음반은 당대의 인지도 및 판매량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현재 인지도에서 크나큰 차이를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소위 "힙스터"의 영역이다. 그러나 단독성의 시장은 정말로 이 힙스터스러움을 기반으로 삼는다. 아마 예전에 나온 "보보스"라는 말처럼 힙스터 역시 얼마 안 가 사라지겠지만, 그 흐름 자체는 "여피" 때부터 지금까지 유사하다.)



보다 끔찍한 일은 이것이 노동과 주체에 미친 영향이다. 근대 시대에 블루칼라 노동이 가질 수 있었던 '충직하게 자기 일을 해내는' 이상적 노동상은 완벽히 퇴물이 되었고, 무언가 가치 있는 단독적인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노동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노동이 되었다. "대체될 수 없는" 노동자에 대한 이상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며, 고학력 신중간계급의 트렌디한 노동이 바로 그 조건에 부합되는 것과 정반대로, 대부분의 다른 노동들은 늘 대체될 수 있는 인력들로 구성되는 양산품이 되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격차 사이에 놓인다. 주체성 역시 마찬가지인데, 진정성 있는 단독성으로 결정되는 한 사람의 가치는 진정성이 요구하듯,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내 종합하고 전시하여 판단되는 것이며, 바로 그 주체성이 단독성의 시장에서 패배할 경우, 그는 모든 의미에서 부정되는 셈이다. (SNS가 사람들을 우울증에 빠뜨린다는 연구는 그 대표적인 예시다.)



그런 점에서는 근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보다 더 친절했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 맞출 수만 있다면 사회는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나머지 개인적인 부분은 낭만주의와 예술의 시장에서 고스란히 그 혼자만의 문제로 간직할 수 있는 탓이다. 후기 근대에는 그럴 수 없다. 바로 이 근대 사회의 이상적인 중산층, 구중간계급은 자신들의 문화가 전면적으로 부정당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실제로도 매우 빠른 속도로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아래에는 신하위계급, 곧 가치가 없는 노동만 하며 부정적인 가치만을 가진 채 생존 그 자체를 위협 받는 이들이 존재한다. 신하위계급은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부정적 가치를 반박하기 위해 구중간계급의 고지식한 보수적인 문화를 찬양하는 경향을 보일 때도 종종 있으며, 덕분에 이 둘의 연대가 이따금 이뤄질 때도 있다. (아마 정치권에서 시골의 중산층과 도시의 부랑자들이 연대하는 경향성이 그 예시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단독성의 테제에 반대하는 현대의 움직임조차 후기 근대 "사회의 문화화"의 배경 속에 있다. 인종공동체, 문화 민족주의, 종교적 근본주의, 우파 포퓰리즘 등을 그저 반동적인 움직임으로 분석하는 연구들을 읽으며 이것들이 그리 의미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느꼈는데, 이 점에서도 <과잉>이 상당히 그럴듯한 분석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이들은 (분석의 많은 세부 사항을 생략하면) 집단적으로 자신의 단독성의 가치를 표현하고자 하며, 신중간계급과 신상위계급과의 개인적 경쟁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선택은 상당히 효과적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 중 하나가 실제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제목이 보여주듯 이 "과잉 히스테리 사회"를 끝내는 몇 안 되는 해결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주체가 모든 측면에서 성공할 수 있는 동시에, 모든 측면에서 몰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이러한 주체의 히스테리함과 몰락을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여주는 병폐라고 분석하였다. <과잉> 역시 후기 근대의 단독성 시장이 긍정성만을 높게 평가하고 개개인의 부정성, 병리학적 증상을 최대한 그 개인의 문제로 은폐하려 한다고 분석하곤 하는데,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입장에서 사실 피셔보다는 이쪽의 분석이 좀 더 와닿는 감이 있다.


P. S.


이 단독성의 시장에서 실패한 이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노래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리 공감가지 않는다. 아마 내가 이미 (별로 부러움을 사지는 않겠지만) 그 힙스터 중 하나이기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