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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내편의 마지막 장은 응제왕-제왕, 황제, 왕에 응하는 이야기들을 모아두었다


응제왕의 마지막 우화, 곧 장자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야기는 혼돈의 우화다


인위 대신 스스로 그러함을 따라야 한다..


시비를 가리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을 해칠 뿐이다..


성심에 기대어 행동하는 것은 타인의 양생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앞서 6개의 편을 통해 장자가 해온 수많은 이야기들로 살점을 덧붙일 수 있다


어쩌면 보르헤스의 알레프나 들뢰즈의 기관없는신체 등을 가져와 덧칠해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장자라는 저술의 마무리라기엔 어딘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곤과 붕의 우화로 호쾌하게 열어젖힌 도입부를 생각하면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편의 재독을 마칠 즈음 조금 발칙하지만 어쩌만 지극히 장자스러운 해석에 대해 듣게 되었다


우선 왜 7개의 구멍인가?


맥락상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 구멍은 감각 기관으로 볼 수 있다


흔히 다섯 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다섯 기관(눈, 귀, 코, 혀, 피부)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통념상 5개의 구멍이 적절하지 않을까? 굳이 7개로 표현할 이유가 있었을까?


혹시 무협에서 종종 쓰이는 칠공분혈처럼 구멍들을 세분화한걸까? 그렇다면 피부/촉각은 어떻게 해야할까?



질문을 조금 바꾸어보자


왜 매일 7개의 구멍을 뚫었는가?


장자 본인이 쓴 것으로 알려진 내편은 소요유, 제물론,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 총 7편으로 나뉜다


숙과 홀이 날마다 하나씩 뚫어가는 7개의 구멍은 곧 독자가 한편씩 읽어가는 7개의 편이다


어쩌면 혼돈의 우화는 독자를 겨냥한 우화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장자는 웃으면서 혼돈의 우화를 써내려갔을 것이다



장자는 엄밀한 논증을 사용하지도, 엄격한 계를 세우지도 않으며, 말을 통해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스스로 그러함에 이르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가야할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심재, 좌망, 오상아, 덕불형, 재전 등 수많은 한자어를 동원하고 곱추, 추남, 외다리, 포정 등의 수많은 우화를 통해 에워쌀 뿐이다



장자는 내편을 통해 말한다


"그러므로 번드르르하지만 개연성은 없는 현란한 말들을 성인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것으로 간주된 '그것이다'를 쓰지 않고, 일상적인 것 속에서 사물들이 임시로 머물 거처들을 발견한다.


'밝게 비춤'의 방법을 쓴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의미가 '장작'으로 간주되는 것에 국한된다면, 불이 한 장작개비로부터 다음 장작개비로 넘어갈 때, 우리는 그것이 '재'라는 사실을 모른다네."



영미권의 유명한 중국철학 연구가인 앵거스 찰스 그레이엄은 주석으로 덧붙인다


"장자는 어떤 것을 택하여 그것만을 '그것'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모든 것을 다 포괄하여 인정하는 데 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온 우주에 대해 '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발상을 좋아한다."



장자의 후학들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잡편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그물은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토끼를 잡고 나면 올무를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의미를 전하는 것인데, 의미를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장자는 자신의 책을 주구장창 붙잡고 무수한 주석 사이를 헤매며 문장들을 뜯어보는 나를 보면 웃어버릴 것이다


앙드레 지드의 표현을 잠시 빌린다면 "나타나엘이여, 이제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