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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는 달리, 아무래도 철학에서 실존주의 그 자체를 다루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나 역시 실존주의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문학 같은 예술 영역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철학 사조보다는 문학 사조에 더 가까운 느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를 인상 깊게 읽은 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사르트르를 읽어보고, 이 실존주의라는 기획이 뭔가 상당히 엇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테다. (그 생각은 이 책을 읽어본 뒤에도 사실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만.) 덕분에 실존주의를 개괄하는 이 책 역시 사상의 근원을 찾는 데에 있어 보다 더 예전의, 문명의 근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본적인 갈등에 대한 생각이 사르트르 시대에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될 때까지의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 흐름에서 돋보이는 생각들은 사실 문학으로 표현되기에 더 걸맞는 생각이다.



그 기원은 참 까마득하게도 유대교, 기독교, 그리스 문화에서부터 시작되며, 세부 사항을 줄이면 이성과 의지 사이의 대립이 그 핵심에 있다. 합리화될 수 없는 것, 사람의 이성이 구축한 체계-이를테면, 유대교의 금기로 가득한 레위기-를 늘 벗어나는 것에 대한 생각은 유대교에서 지배적이었으며 이는 이후 키에르케고르가 구체화하는 신성 앞에서의 고독한 단독자에서 근대 이성의 분열을 딛고 부활한다. 그리스 문화의 이성은 의지를 보다 더 경시했지만 그 이성은 그럼에도 인간 신체로부터-몸을 가지고 있는 신들의 신화를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고, 이성의 견고한 체계의 몸체를 이루는 것은 여전히 의지였다. 중세 기독교는 이 논쟁을 주지주의와 주의주의의 형태로 이어갔으며, 데카르트는 이성을 나머지 모든 것들에서 완전히 찢어놓는 데에 성공하며-이 주제에 한정해서 말하자면-근대를 열어젖혔다. 이때부터 의지는 점차 갈 길을 잃고 이성의 체계가 구축해나가는 옹성 속에서 기이하고도 종교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파스칼의 <팡세>,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의 소설들, 그 밖의 여러 문학 작품들이 이성의 체계가 도저히 보장해주지 못하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재차 환기시킨다. 이는 이성의 세계가 그럼에도 극복하지 못한 근본적인 욕구에 대한 배반-이 고통 가득한 세상과 그 최종적인 고통, 죽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특히 그 기대가 가장 처참하게 배반당한 두 세계대전 이후 이것이 철학의 형태로까지 나타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성의 총체인 병약한 이반 카라마조프 앞에 그의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쳐, 악마가 나타나 그의 운명을 냉소하는 모습에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다른 모든 주제와는 달리 종교가 스며들 수가 없다. <악령>의 혁명가들이 드러내듯 이들은 종교를 저버렸고, 그에 대한 해결책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야만 할 뿐이다. 이상의 "실존주의 문학"들은 훌륭한 문학 작품이 으레 그렇듯, 우리의 삶에서 쉬이 깨닫지 못하거나 너무 늦게 이해하게 되는 생각들을 알려준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니체와 같이 철학과 문학 사이의 무언가를 하던 이들을 지나 하이데거에 이르러 최초로 종교색이 사라진 철학이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야스퍼스의 이름은 이 책에서 굳이 중요하게 호명되지 않았다.) 일찍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이지만, 당시 하이데거의 사상은 이 시대의 새로운 존재론을 이야기하되, 종교를 일종의 숨겨진 비계로 삼아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일반론은-비록 하이데거 본인은 인간만을 초점으로 두지 않기 위해 현존재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자신의 죽음을 주관하는 어떤 신적인 존재를 상정하는 것만 같고, 그나마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는 덕분에 거의 자기개발서를 헤겔의 언어를 빌려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냄새가 풍긴다. (사실 키에르케고르가 반대했던 "이성"의 대표가 바로 헤겔의 체계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기이한 회귀이기도 하다.)



그래도 확실히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었다. 여전히 하나의 철학보다는 문학 사조로서 실존주의가 더 익숙한 것은 똑같지만, 그런 막연한 느낌을 한데 묶어 억지로라도 계보를 만드는 기획으로선 나쁘지 않았다. (사르트르의 철학서보다는 <닫힌 방> 같은 문학 작품이 더 나은 것도 그래서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아마 다음에는 이런 기류에 좀 더 맞닿아 있는 비트 세대의 작품들을 좀 더 읽어보려고 한다. 케루악과 긴즈버그는, 버로스에 관심 있는 입장에서 한 번쯤 읽어봤을 법하지만 영 손이 안 가던 이름이었긴 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