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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는 기타 잇키의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 패러디.
“현대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다려져 오는 것은, 자세한 분과적 연구가 아니고, 자료들의 인용이나 사실들의 다양함도 아니다. 그것은 전체를 망라하는 통일적 두뇌이다.” - 기타 잇키,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 中.
1. 서론
처음에는 이 글을 “이념” 개념이 가진 이중성이, 그 내적인 긴장이 어떻게 독일 관념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두고 쓰려고 했다. 그런데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면서 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은, 칸트에게서 “자연”이 가지는 내적인 긴장과 그에 대한 칸트의 집착이었다. 그래서 주제를 바꿔, 칸트가 종합하려한 테마들이 어떻게 『순수이성비판』에서 서로 충돌하고 반발하는지를 주제로 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금언으로 삼은 아도르노의 말이 하나 있다. 인용해보겠다:
“이 두 요소가[주관주의와 인식의 객관성이] 어떻게 마찰하고 있으며, 어떤 짜임관계에서 서로 나타나고 있는지 그리고 이때 어떤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내가 이 강의를 위해 계획한 과제입니다.”(Th. W. 아도르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박중목, 원당희 옮김, 세창출판사, 17p. 이하 『칸트』로 약칭.)
『순수이성비판』은, 모두가 잘 알다시피,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을 종합한 책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종합했는가? 칸트는 또한 독일 관념론으로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지만, 칸트 자체는 엄밀히 말하자면 독일 관념론에 속하지 않는다. 독일 관념론에 칸트가 속하지 않는 이유는, 칸트가 이 종합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머무르고 있는 이 종합을, 그리고 그것의 성공 여부를 알아보자.
칸트는 라이프니츠-볼프 학파 출신이고, 이것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반성개념을 다루는 장에서 라이프니츠를 무려 몇십페이지를 할애하여 비판하는 부분이지만, 필자는 모나드론 읽다가 나가떨어졌으므로 이 부분은 넘어가자. 어짜피 칸트 전공할 것도 아니고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통각 개념 차이 같은 것이 뭔 상관인가. 볼프가 용어를 정립하기는 했는데, 크리스티안 볼프는 번역도 제대로 안 된 사람이므로 넘어가자.
아무튼, 칸트가 이 저작에서 그 다음으로, 그리고 사실상으로는 가장 많이 영향 받은 이는 데이비드 흄이다. 흄은 다들 알다시피 철학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급진성을 가진 회의주의를 전개했다. 그 철학자 강간범 들뢰즈조차 흄을 더 급진적으로 해석하기는 커녕 능력 이론이라는 온건화된 해석만을 전개할 수 있었다. 동시에 아도르노에 따르면, 칸트는 자연과학과 철학을 함께 이해했던 최후의 철학자였다. 칸트에서 분석철학 직전까지의 철학자들 중 이 둘을 진정으로 조화하고자 했던 이는 그나마 엥겔스가 유일하고, 그것도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아니었다.
즉 칸트의 준거점은 흄과 뉴턴이라는, 두 극단이다. 이 두 극단을 종합하는 과제가 『순수이성비판』의 과제였다. 이 종합은 칸트에게도 까다로운 과제였기에, 『순수이성비판』은 동일한 테마를 마치 바흐의 푸가처럼 반복하는 구조를 갖는다. 어떠한 테마를 반복하는가? 자연이라는 테마를, 주관을 통한 객관의 구원이라는 테마를. 칸트는 A판 연역이든 B판 연역이든 원리들의 유추든 대부분의 논의들을 자연 개념을 논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그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다.
2. 『순수이성비판』의 긴장
"여러분이 이제 청취해야 할 모든 것의 모토로, 내가 프로그램을 미리 언급해도 좋다면, 칸트의 시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주관주의를 통해 인식의 객관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관과의 관계를 통해 주관주의로 상대화하고, 회의적으로 제한되었던 객관성을 하나의 객관적 인식으로서 주관 자체 속에서 근거지으려는 것입니다." (『칸트』, 16p.)
『순수이성비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주관으로의 전회에 있지 않다. 주관으로의 정향은 이미 데카르트나 흄에서 일어났다. 칸트의 전회는, 그러한 주관주의와 뉴턴을 종합하여, 주관을 통해 객관을 구원함에 있다. 칸트는 객관적임의 의미를 재규정하고자 한다. 칸트에게 자연은 현상의 총체이지 물자체가 아니다. 칸트에게서 자연은 처음부터 다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연이라는 것 자체는 현상들의 총괄 이상의 것이 아니며, 그러니까 사물 자체가 아니라, 한낱 마음의 표상들의 집합일 따름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I. 칸트,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331p. 이하 『비판』으로 약칭.)
“범주들이란, 현상들에게, 그러니까 모든 현상들의 총괄인 자연(질료상으로 본 자연)에게 선험적 법칙을 지정하는 개념이다. ” (『비판』, 368p.)
칸트에게서 이러한 의미로 규정된 자연은 어찌보면 매우 주관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자연이라는 단어가 직관적으로 가지는 그 어떤 의미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칸트에게 자연이란 개념이 가지는 긴장은, 순수 범주와 경험 사이에서의 긴장으로 표상되고 있다. 칸트의 목적은 뉴턴 자연과학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그것은 흄의 공격을 자연에 범주를 적용함이 타당성을 가지게 함으로서 방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칸트는 흄의 공격을 어느정도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흄의 공세로 밀려나간 영토에서 성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경험=자연에 범주를 적용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를, 칸트는, 뉴턴의 편에서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첩자로서 뉴턴과 흄의 종합 위에서 수행해야만 했다. 종합되기 극도로 어려운 두 극단을 종합하려는 칸트의 시도는 경험에 범주를 적용하는 것이 타당함을 보이는 초월적 연역에서 정점을 이루는데, 이 장은 매우 거칠다. 그러나 그 거침은 상이한 동기들의 충돌에서 오는 거침이다.
통각, 범주, 자연, 경험. 이 4가지가 대립하며 긴장을 이룬다. 특히 경험에 대한 통각과 범주의 관계의 모호함이 그렇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그저 ‘ 하, 그럼 그가 틀렸군! 추론을 잘못했어! 고루한 칸트는 정말 멍청했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이것 대신에 여러분이 『순수이성비판』에서 제기할 난점들이 바로 서로 온갖 손실을 입히는 사유 동기들에서 기인한다고 이해하려 한다면 이 난점들을 가장 잘 마무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칸트』, 66p.)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순수 주관에서 객관을 구원한다는 기획이다. 따라서 그것은 처음부터 긴장을 가지는 기획이다. 칸트는 뉴턴을 위해 범주들이 자연에 객관적인 타당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자연은 “현상들의 총괄”로, 직관의 잡다가 주관과 관계되어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연”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일반적 의미로 인해 자연은 은밀히 객관과 연계된다. 칸트는 흄적으로 계속하여 범주들이 주관적 타당성만을 가진다는 테마를 반복하지만, 동시에 뉴턴의 성과는 칸트로 하여금 그것이 일상적 의미에서의 자연, 즉 물자체에도 적용된다는 늬앙스를 풍기게 하게끔 한다. 그리고 이 긴장이 자연이라는 용어의 다의성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아마추어 논리실증주의자마냥 무시해서는 불모의 비평이 되고 말 것이다.
“즉 논리실증주의자 및 의미론자의 방법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해결함에 있어서 다의성을 제거하고 이게 모두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 그러니까 이것으로 문제가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 일을 끝내는데, 이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보다 다의성이 있는 곳, 따라서 동일한 용어가 여러 사태들을 생각하게 하는 곳에는, 일반적으로 동일한 용어를 통하여 숙고된 사태들 간에는 어떤 실질적 관계가 있습니다.” (『칸트』, 187~188p.)
칸트는 A판의 초월적 연역을 B판에서 고쳐쓰는데, 그 상이한 연역들의 긴장은, A판에서는 초월적 대상=X가 자아의 동일성의 근원으로 강조되는 반면에, B판에서는 초월적이지 않고 내적인 초월적 통각이 근원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 한 예시이다. 뿐만 아니라 통각은 B판에서 매우 거대한 비중을 가지게 된다.
칸트는 범주와 경험사이의 긴장을 초월적 통각으로 해소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현상이 통각으로 인해 가능함을 보이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통각과 범주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거칠고, 간극이 있다. 초월적 통각과 범주중 어느 것이 우선하는지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극히 긴장적이다. 칸트의 논리는 체계적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어떤 갭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0.9999999…가 1과 같음을 ‘직관적’으로는 납득하지 못하는 그 어떤 갭을. 이 갭이 범주와 경험 사이의 긴장이고, 자연 개념이 가진 긴장이다.
칸트의 설명을 말하자면 이렇다. 현상들은, 잡다가 통각에 의해 통일되어야, 그러니까, 그 잡다가 동일한 주관에 의해 생각되고 있는 것으로 통일되어야 하고, 그 동일한 주관도 동일한 것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즉 잡다가 통각에 의해 주관에서 통일되어야 현상이 구성된다. 그런데 주관의 통일 기능은, 범주들을 사용하는 것 말고는 없다. 따라서 현상은 범주들에 의해 구성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자연이다. 따라서 자연과학은 유효하다.
여기서 초월철학의 방법인 초월론의 긴장이 드러난다. 칸트의 초월론은 한편으로는 우리는 현상을 범주를 통해서 밖에만 사고할 수 없다고 말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주관 너머에도 타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객관을 재정의한 후, 객관이라는 단어의 다의성을 이용해 재정의 이전의 객관에 자신의 설명을 은밀하게 부여하는 것이 초월론에 고유한 특성이다. 그렇기에 초월론에서 말하는 “객관”은 그 상대자들이 말하는 “객관”이 아니다. 철학사가 괜히 칸트에게 관념론자요 불가지론자라는 분류를 붙인게 아니다.
칸트는 범주들이 경험에 대해 타당한 한에서만 타당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범주는 경험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선험적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서술이 칸트의 긴장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긴장이 꼭 오류임을 말하지는 않는다.)
칸트에게 자연은 마음의 표상의 집합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칸트는 자연에는 우연적이고 주관적인 통일 이상의 것이 있다면서, 은밀히 자연을 원래의 의미대로 사용한다. 이는 모순이다. 물론 칸트는 이것을 이론적으로 변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상이한 동기들이 힘의 장을 형성하고 있음은 변호할 수 없을 것이다. 어짜피 이론적 변호가 전부라면, 야코비의 반박으로 우리는 칸트 철학을 폐기처분할 수 있을 진데, 그러기보다는 칸트에게서 상이한 준거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문제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칸트의 자연은, 객관은, 이론적으로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칸트의 객관 개념을 수용할 수학자나 자연과학자는 없을 것이며, 이는 칸트 본인에게도 해당된다. 수학자들 중 아무도 자신들의 정리들이 if ZFC 공리계가 옳다면 then…. 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칸트도 만일 객관이 주관의 구성이라면 우주먼지가 뭉쳐 행성을 형성한다는 자신의 이론은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학자로서의 후설은 1+1=2임이 상호주관에 불과한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글쎄다. 이러한 갭이, 이러한 간극과 긴장이, 칸트를 물자체로 이끈다. 칸트에게 자연은 주관의 형성물이지만, 그러한 간극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칸트는 그 자연에 물자체의 촉발이라는, 진정한 객관적 요소를 넣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칸트의 아킬레스건이 된다.
『순수이성비판』 본론의 첫 문단 중 하나는 이렇다. “우리가 대상들에 의해 촉발되는 방식으로 표상들을 얻는 능력(곧, 수용성)을 일컬어 감성이라 한다.” (『비판』, 239p.)
이 “대상들”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칸트에 대한 야코비의 비판을 소개하고 가겠다. 야코비는 칸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대상들이 없다면 감성은 촉발되지 않을 것이고, 직관의 잡다도, 현상도, 자연도, 범주의 적용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상이 감성을 촉발한다는 것은, 인과관계가 아닌가? 그것은 범주를 적용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라면, 칸트는 현상 너머에 범주를 적용시키고 있고, 맞다면, 그의 말은 휘파람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순은 자연에 객관적인 근거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동시에 또 자연을 원래의 의미에서의 자연으로 다루고자 하는 칸트의 동기가 나타난 모순이라고 하겠다.
칸트가 세운 체계에서 물자체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칸트가 비판한 독단론이 된다. 물자체를 기각한다면 그것은 칸트가 비판한 버클리적 관념론이 된다. 이에 칸트는 객관을 주관에 상관적인 것으로 내세우지만, 그것은 야코비가 지적한 모순을 낳거나, 객관을 주관에 환원시켜버릴 따름이다.
즉 칸트는 회의주의에 대한 해법으로 객관을 재정의하여 객관을 옹호하고자 하지만, 그 객관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이 전혀 아니며, 회의주의가 저격하는 객관도 또 가지론자들이 말하는 객관도 아니다. 그것은 주관으로 흩어진 객관이고, 회의주의에 대한 은밀한 패배 선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흄은 객관을 칸트보다 더욱 객관주의적으로 생각하였다.
흄은, 불가지론자로서는, 칸트보다 훨씬 객관주의에 가까운 철학자이다. 그에게 자연이란 현상의 복합도 물자체도 아니다. 흄은 자연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흄은 칸트가 그랬듯이 객관을 주관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자연과학적 앎을 궁극적으로 주관에 기초짓지도 않는다. 오히려 흄은 자연과학적 앎이 주관에 기초지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을 잘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러한 앎을 객관에 기초지을 수 없다는 것도 알 고 있었다. 흄은 인과성을 주관적 범주로 환원하려하지 않는다. 기실, 회의주의자는 그 누구보다도 객관주의적이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자는 객관성에 대해 가장 높고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기에 회의주의자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턴의 신봉자인 칸트는 물자체에 대한 불가지론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연과학이 요구하는 객관성이 고작 주관에서 찾아질 수 없는 것임은 천체학자인 칸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엥겔스와 레닌이 괜히 칸트의 물자체와 로크의 실체 개념을 그들 철학의 유물론적인 요소라고 했던 것이 아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 태양이 우리의 감각복합이라면, 우리는 태양이 내일도 뜰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태양은 그것에 따를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태양이 내일도 뜰 것임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버클리가 상식을 구제하고자 했던 방식이다. 반면, 태양이 감각복합이 아니라면, 태양은 우리의 의지에 따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단순히 우리가 태양이 내일도 뜰 것임을 당연하다고 믿기에 태양이 떠오르지는 않을것이다. 따라서 태양이 내일 뜨는 것은 좀 더 고도의 증명을 필요로 하는, 자명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이것이 관념론이 가지는 반-회의주의성이고 유물론이 가지는 회의주의성이다.
여하튼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을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한다. 칸트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객관론이 있는데, 하나는 객관주의에서 기인하는 불가지론이요, 다른 하나는 객관주의에서 기인하는 가지론이다. 칸트의 대부분의 논증은 우리는 우리 판단에서 이러이러한 객관성을 본다, 따라서 이러이러한 것을 가능케 하는 저러저러한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구조이기에, 문제의 이러이러한 객관성을 흄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칸트의 흄 비판은 수포로 돌아간다.
칸트는 나는 사고한다가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하여야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며, 거기에서 자아가 관념의 다발이 아님을 보인다. 그러나 칸트의 논변은, 우리의 표상이 의미를 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일 모든 것을 의심하는 순정한 회의주의, 순정한 흄주의를 구성할 수 있다면, 애초에 우리의 표상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초월적 연역 앞에 경험주의에 대한 길고 지엽적인 비판이 있다. 이 내용의 일부를 요약하자면 경험에 어떻게 범주가 적용되는지를 경험주의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인데, 애초에 흄은 그런 반론에 대해 범주가 경험에 적용되기는 하는지를 묻지 않을까? 분명 급진적인 대응이지만, 자아도 부정한 철학자가 뭘 못하겠는가?
3. 결론: 칸트의 외줄타기
이렇게 칸트에게서 객관적인 것은 기실 주관적인 것이기에, 뉴턴의 구출도 흄의 부정도 되지 못한다. 그러면서 뉴턴의 부정도 흄의 구출도 되지 못한다. 이러한 긴장이 칸트 철학을 구성하고 있다.
칸트에게서 객관은 주관 내에서의 객관이다. 그리고 그가 종합하려던 두 극단, 즉 흄과 뉴턴 모두 주관 외부의 객관을 겨냥했기에, 그의 종합은 사실상 둘 사이에서의 무한한 긴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칸트도 이를 알았기에 물자체라는 객관적인 테마를 도입하려 했으나, 야코비의 비판이 보여주듯이 이것 자체가 또 다른 긴장이다. 따라서, 칸트주의를 수미일관하게 구성한다면, 즉 순정칸트주의를 만든다면, 그것은 순정회의주의일 것이다.
칸트는 흄의 전제들을 비판했지만, 그것은 기억 같이 흄이 회의주의로 완전하게 빠지지 않기 위해 설정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들을 파괴해버렸고, 그 결과 우리는 여기에서 흄보다 더 급진적인 회의주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칸트는 뉴턴과 흄을 종합하고자 했지만, 그 결과는 자연 개념의 무한한 긴장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은 뉴턴과 흄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칸트의 몸부림이다.
4. 잡설들
읽으면서 문제사로서의 지성사와, 그리고 철학사에 대한 변증법적인 독해란 무엇인지에 대한 중요성을 느낀 책이었다. 단순히 철학사적으로 개별 철학 텍스트를 균질적인 발전과정으로 독해하기보다는, 변증법이 요청하듯이 사태, 여기서는 즉 텍스트 그 자체로 들어가 그것의 문제의식과 긴장을 독해하고, 그 긴장이 어떻게 변천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순수이성비판』은 나에게 문제사적 독해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순수이성비판』이 소위 3~4대 난서로 꼽히고는 하는데, 그 악명에 ‘비하자면’ 쉬운 편에 속하는 책이다. 이것보다 헤겔 텍스트들 중 그나마 읽을만 하다는 정신현상학 서문이 더 어렵다. 위에서 말했듯이 칸트가 동일한 논의를 계속 반복하고 있어서, 한번 그 구조를 이해하면 그 다음부터는 공이 비탈을 굴러가듯이 속도가 붙는다. 형이상학 서설이 약간 더 어려워졌을 뿐이고, 조심스레 말하자면, 그 악명높은 도식론은, 개인적으로는 보편 - 개별에서 발생하는 소위 제3자 문제가 나타나고 있어서 어려운 것이라, 애초에 텍스트 자체가 헐렁하다고 생각한다. 도식론을 읽으면서 이게 뭐지 싶을 수 있는데, 그건 이해가 안되서 아다리가 안 맞는게 아니라 텍스트 자체가 아다리가 안 맞는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편을 권한다. 본인이 칸트 도식론으로 논문 쓸 거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순이비를 읽으려면 칸트 이전 철학사를 꿰야한다는 말을 듣고 칸트 이전 철학자들, 그러니까, 에라스뮈스, 조르다노 브루노, 몽테뉴, 베이컨,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 로크, 버클리, 흄, 라이프니츠를 죄다 읽었는데, 의미없는 짓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흄만 읽어도 충분할 것 같다. 거기에 추가로 (파스칼과) 스피노자 아님 라이프니츠 정도? 데카르트와의 연관은 동서역으로 『철학의 원리』를 읽을게 아닌 이상에야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판단력 개념이 매우 애매한 지위를 가지고 다뤄지는데, 이게 판단력 비판을 쓰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뇌피셜을 굴려본다.
잘 읽었습니다. 절반은 제대로 이해했으려나 모르겠네요. 기회가 된다면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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