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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hu Lovely MuniMuni MuraMura PrinPrin Boron Nururu ReroReroProvided to YouTube by 株式会社バップ_2ChuChu Lovely MuniMuni MuraMura PrinPrin Boron Nururu ReroRero · MAXIMUM THE HORMONEBu-ikikaesu℗ 2007 VAP INC.Released on: 20...youtu.be

(듣든가 말든가)



푸코의 예술철학 : 모더니티의 계보학


목차


1.책소개

2.서평

3.시대구분

4.고고학과 계보학

5.근대예술의 조건

6.근대예술의 내용

7.견유주의적 태도



1.책소개

푸코의 예술철학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시각예술에 대한 분석, 즉 시대에 따라 예술의 내용과 형식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대한 분석을 모은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첫째는 푸코의 고고학적 방법론이 미학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며 미술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근대예술이 담고 있는 주체성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하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근대철학과 '주체성'에 대한 조금의 고민을 안겨주길 바란다. 또한 푸코는 역사적인 것에 대해 탐구하였지만 이는 과거를 보고자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역사, 당대의 문제를 보기 위한 것으로 의사가 환자의 생활습관을 보듯이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한 번 정도 우리의, 지금의 예술과 정체성에 대한 돌아보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 정의를 하면 예술의 내용이란 "그 예술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미학적 규칙"이며, 예술의 형식이란 "예술을 인식하고 창조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그러니 전통적인 의미로 "미학"을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2.서평

우선 전체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푸코에 대한 입문수준의 지식이 있다면 방법론과 근대 이전을 다루는 1~3장과 성의 역사의 내용을 다루는 5장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근대예술의 내용인 '반-플라톤주의'를 다루는 부분은 들뢰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예시 없이 이론만 주구장창 설명해서 이해가 어렵다.

그리고 나는 앞에 그림이야기하는 것보다 5장에서 주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더 와 닿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예술도 내용이 아니라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대중의 반감이 줄어들까? 아닐 것 같다.

참고로 이 글에서 쓴 그림은 책엔 없고 검색해서 봐야한다.


3.시대구분

푸코의 철학은 성의 역사 이전에는16세기 이후 유럽을 대상으로하고 그 안에서 기대를 구분한다.


16세기 초 ~ 17세기 중반 : 르네상스

17세기 중반 ~ 18세기 말: : 고전주의

19세기 초 ~ 푸고사망 당시: 근대(모더니티)


이는 그의 대표작 '말과 사물'에서 정립된 구분으로 전작인 '광기의 역사'에서도 유효한 구분이다. 푸코는 사망 당시까지도 근대가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그런의미에서 진정한 근대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한 푸코는 말년에 죽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연구를 정리하는데 이를 세 시기로 나눈다.

임상의학의 탄생~지식의 고고학: 지식의 고고학

담론의 질서~성의 역사 1권: 권력의 계보학

1975년부터의 강의록~성의역사 2,3권: 윤리의 계보학

여기서 지식, 권력, 윤리는 연구의 대상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지식⊂권력⊂윤리'의 포함관계가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 계보학은 방법론으로 뒤에 다루자. 푸코는 지식, 권력, 윤리를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정의한다. 지식은 (예술, 문학을 포함한)인식에 부여되는 규칙, 권력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효과, 윤리는 자신이 스스로와 맺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 책에서는 권력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4.고고학과 계보학

고고학과 계보학은 푸코의 방법론으로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싶다. 그의 방법론의 가장 큰 특징은 내용과의 필연성이 없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를 예로 들면 방법적 회의는 필연적으로 의심하는 주체인 코기토도 이어진다. 고고학은 그렇지 않다.

지식의 고고학이란 해당 시대의 인식, 지식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규칙을 발굴해내는 것이다. 이 규칙들은 각각의 단절에 의해 발생한 연속성 없는 별개의 것이다. 이에 따라 푸코는 르네상스에는 유사성, 고전주의에는 재현, 근대에는 역사라는 규칙이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재현이 주로 다뤄진다. 재현이란 이곳에 없는 것을 이곳에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계보학은 말 그대로 계보를 따라 올라가는 것이다. 다만 이 계보학은 우리의 뿌리를 찾는 게 아니라 근원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푸코의 표현대로 계보라는 건 기본적으로 편집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근대예술의 뿌리라고 여기던 게 아닌 곳에서 뿌리를 찾아볼 것이다.

푸코는 "설계에 있어서 계보학적으로, 방법에 있어서 고고학적으로"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계보학적으로 근대예술의 뿌리를 찾으면서, 고고학적으로 그 과정 속에 있는 단절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회화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으로서의 사건으로 취급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그림이 무슨 의미인가?'가 아니라 '이 그림은 무엇을 하는가?'라고 질문해야할 것이다.


5.근대예술의 조건

근대예술의 조건은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근대예술이란 '르네상스적 관습과 고전주의의 회화'의 부정이다. 이 부정의 과정은 근대가 시작하는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이루어졌다.


5.1르네상스적 관습 부정

책에서는 과트로첸토 시대의 관습이라 하는데 걍 르네상스적 관습으로 통일한다. 이 관습은 재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회화가 갖는 물질적 속성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림이 재현을 하고 있다면 그곳엔 그림이 아닌 재현된 공간이 있는 것이다.

관습의 거부는 대충 회화의 물질성, 추함을 드러내고 조명을 대체하고, 관객의 자리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이는 이 관습이 발생기키는 재현의 효과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최초로 원근법을 도입한 마사초의 [성삼위일체]다. 이 그림은 워낙 크기도 해서 저 공간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 그림과 푸코가 예로 드는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그림을 비교해서 보면 편할 것이다.


1)회화의 물질성 드러내기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

그림의 정면은 검은 양복과 모자를 쓴 사람들에 의해 깊이감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또한 양 옆의 기둥과 2층 바닥이 직사각형의 틀을 만든다. 이는 이 그림이 공간을 재현하면서 '평면이며 직사각형인 회화의 물질적 조건'을 동시에 재현한다. 따라서 관람객은 회화를 보면서 재현된 장면 뿐 아니라 물질적 조건을 함께 느끼게 된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이 그림은 당시 프랑스 정치의 실패로 여겨지는 중대사를 표현했으며 그를 노리고 193x284라는 큰 크리고 제작했다. 여기서도 위와 같이 담벼락으로 평면과 수평을 만들어 회화의 물질적 조건을 드러낸다. 또한 그림 속의 거리에 집중해보면 발의 위치를 통해 보이는 황제와 처형군의 거리와 총의 길이로 보이는 거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관람객은 필요한(실재한) 거리와 보이는(해성상의) 거리 사이에 끼이게 된다. 쉽게 말해 이 그림에서 거리는 보이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인식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철도]

철창과 연기가 회화의 물질적 조건을 드러낸다. 마네의 그림으 대부분 그렇지만 인물들이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소녀는 연기로 가려진 어딘가를 보고, 여인은 관람객에게 시선을 던진다. 이들의 이목을 끄는 대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관람객은 있어야 할 게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2)조명의 도식 대체하기

[우르비노의 비너스] - 티아치노

[올랭피아]- 마네.

올랭피아는 위의 비너스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차이점으로 비너스는 여신의 이름이 붙여진데다 귀족 여인인데 반해 올랭피아는 명백히 고급 창부라는 점이다. 이걸로 논란이 있었다. 쨋든 비너스는 뒤의 창에서 빛이 들어오고 정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명이 비너스를 감싼다. 이 그림은 그곳에 재현된 공간이므로 이 그림을 본 관객은 우연히 이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관람객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올랭피아에서는 조명이 그림에 수직으로 들어간다. 이는 미술관의 조명이 그림으로 들어가듯이 회화의 물질적 조건을 드러내면서 관객의 시선을 대변한다. 여기서 조명은 관객의 시선으로 관람객이 보았기 때문에 그림이 보였다. 그 의도성으로 인해 그림의 목적은 쾌락이고 관람객은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풀밭 위에 점심식사]

이 역시 창부를 대동하는 그림이라 논란이 있었다. 쨋든 그림의 전명부와 후면부의 조명이 다르다. 전면부는 수직으로 들어가는 조명으로 올랭피아와 같은 효과를 낸다., 후면부는 고전적인 조명으로 하늘에서 나무를 뚫고 들어온 여인을 비춘다. 이는 관습과 관습의 거부가 공존하는 그림이다. 후면부는 고전주의를, 전면부는 모더니티(근대)를 상징한다.


3}추함 이용하기

[발코니] - 에두아르 마네

[원근법2 : 마네의 발코니] - 르네 마그리트

수직, 수평의 창틀과 그 안의 어둠이 회화의 물질적 조건을 드러낸다. 이 그림의 특징은 창틀처럼 공간을 표현할 뿐인 물질에 선명하고 눈에 띠는 색을 활용하면서 인물은 흰색, 검은색만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는 인물, 하다못해 자연물이나 주목하는 대상에 선명한 색을 활용하는 캔버스의 규칙을 무시하는 행위다. 마네에게 추함이란 구도, 색채 등 미학적 기대에 대한 저항이다.

이 그림은 미학적 규칙의 한계 지점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중인데 창틀 안의 어둠과 밖의 밝음의 대비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라는 점에서 표현된다. 후에 마그리트가 그린 [원근법2: 마네의 발코니]는 이점을 꿰뚫고 있다.


4)관람자의 위치

[폴리 베레제르의 바]

고전주의 회화에서 재현은 관람객의 자리를 지정한다. [성삼위일체]를 보아라. 예수의 발 아래가 무릎 꿇을 자리다.

여기서는 거울이 회화의 물질적 조건을 드러낸다. 다들 보자마자 알 수 있다. 눈 앞의 바텐더와 거울 속 바텐더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비치는 바텐더의 뒷모습, 바텐더의 시선이 다르다. 전경의 바텐더는 앞에 사람이 없어서 조명이 정면으로 들어가지만 거울 속에서 그녀는 (관객으로 보이는)남성과 마주보고 있다. 이 그림 속에는 (관객이라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중첩되어있다. 이런 구도에 의해 물질성을 드러내는 효과가 발생한다. 관람객은 그림이 재현된 공간이 아님을 인식하고 자신의 자리를 이동시킨다.


5.2고전주의의 회화

앞서 마네의 추함이 미학적 규칙에 대한 저항이라고 설명한 것의 연장선에 있다. 고전주의 회화는 [성삼위일체]와 같이 재현이라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렇다면 재현이 갖는 미학적 규칙은 무엇인가? 다음과 같다.

(1)언어기호와 시각기호의 엄격히 구분한다.

(2)유사성은 확언을 내포한다.

(1)은 보는 것과 읽는 것은 문법이 다르기 때문에 한 공간 안에서 완전히 융화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둘 사이에는 (일방이 타방을 수식하는) 일종의 상하관계가 성립한다. 교과서의 그림은 글의 이해를 돕고, 그림책의 글은 그림을 설명하는 것이 예다. 회화에서 언어기호와 시각기호가 구분되기 때문에 시각기호는 언어기호의 지시적 기능을 활용할 수 없다. 즉 그림은 '이건 A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 (2)의 확언이 활용된다. 그림은 A를 보여줌으로써(유사하게 재현함으로써) A임을 확언한다. 이 규칙은 회화 외부의 대상을 재현하는 고전주의 회화의 미학적 규칙의 근간을 이룬다.

이 규칙은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 르네 마그리트에 의해 파괴된다. 이 파괴를 통해 회화는 외부의 대상을 재현하는 게 아닌 회화 그 자신과만 관계를 맺는다.


1)칸딘스키의 유사 부정하기

[구성VIII]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면 참 뭔가 싶다. 뭐 제목이랑 매칭이 되서 덜 혼란스러울지도? 이것은 무엇의 표현인가? 직선, 곡선, 도형 등 그저 형태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은 어떻게 봐도 실재하는 대상을 재현한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그림이 무엇을 확언하는지는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도형 등의 형태를 확언한다. 칸딘스키는 이런 방식으로 유사와 확언의 관계를 분리시킨다. 유사가 확언을 포함하지 못한다. 유사가 불가하므로 회화는 회화와만 관련을 맺는다.


2)클레의 구분 무어트리기

[아침식사 시간의 명상]

이젠 어이가 없다. 뭐지 이건? 클레는 언어기호를 그림의 평면 위로 끌어올린다. 느낌표는 닭의 감정상태인지, 색감 보충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아침식사니까. 게다가 닭 뒤에 있고. 푸코는 이를 두고 "의미를 드러내는 역할로서가 아니라 기호로서의 존재방식 측면에서 기호를 활용한다."고 표현했다. 솔직히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뒤에 마그리트에서 보겠지만 아마 기호에서도 재현의 역할을 제거하는 게 아닐까? 쨋든 이렇게 시각기호를 그림의 평면으로 끌어올려 읽기와 보기의 구분을 흩으린다.


3)마네의 급습적인 공격!

마네는 화실에 놀러온 손님에게 제목을 추천받고 나중에 그린 그림에 붙였다고 한다. 마그리트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도록 했던 정신적 과정을 관람객들이 밟도록 료구하는 제목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목은 그림의 의미와는 직접 상관 없을 수 있다.

[지는 저녁 le soir qui tombe]

창 속에 해가 저무는 것 같진 않다. 석양이 지지도 않았고, 오히려 좀 파란 것 같기도 하고. 이 그림에서 깨진 유리와 태양은 사물은 떨어지면 깨진다는 개념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실체 없는 실재인 언어가 유리창과 태양을 떨어트려 깨뜨린 것이다. 보아야 하는가, 읽어야 하는가?

[대화의 기술 l'art de la conversation]

이 그림에서 언어는 세계를 구축하는 건축물이다. 아래 작게 있는 두사람의 대화는 들을 수 없고, 그림자를 드리우는 블록에 대화가 흡수된다. 관람객은 돌을 꿈(rêve)이나, 죽음(crêve), 휴전(trêve)으로 읽힌다.

'대화의 기술'은 매일 있는 사람들의 수다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는 사람은 없고, 그 자리를 지킨체 인간의 무관심 한복판에서 자기의 언어를 만들고 있는 사물의 익명성을 보여준다. <<이게 시발 무슨 개소린지 아직 잘 모르겠음. 지식의 고고학적으로 보면 인식의 규칙이 갖는 익명성을 표현했다는 것 같기도?

[수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인물 personnage marchant vers l'horizon]

여기서 언어는 시각적 경험을 대체하는 물리적 형태를 띤다. 단어들은 클레와 같은 언어적, 시각적 혼한물이 아니다. 단어들은 언어적 현실과 상상력을 연결한다. 작품의 공간에 단어가 출현하여 그려지는 자리에 기록되어 재현(보여줌)의 필요를 없엔다.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s]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언명. 이 언명을 통해 재현으로 인한 보기와 읽기의 구분이 무너진다. 보기와 읽기는 문법이 다르기 때문에 융합되지 않고 서로를 받치기만 한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언어적 요소화 조형적 요소의 구분점을 없엔다. 이 거짓된 공간에서 언어의 지시적 기능과 조형의 확언적 기능은 무력화된다.

파이프 그림을 보고 '이게 무엇이냐?'라고 질문하면 자신도 모르게 '이것은(ceci) 파이프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재현의 작용이 교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ceci'이 무엇을 지시하든 파이프는 아니다. 이걸 보면 교육받은 사람은 언어와 조형의 관계(푸코는 안정된 위치라고 한다)를 따라 사고하고 싶기 때문에 '이것은 파이프야!'라고 외치고 싶게 된다. 이렇게 {파이프그림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파이프그림}을 맨돌면서 그림은 실재하는 파이프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그림과 언명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자신과만 관련을 갖는다.


6. 근대예술의 내용

근대예술은 르네상스적 관습과 고전주의 회화가 붕괴한 토대에서 발생했다. 이 토대란 무엇인가? 재현의 거부, 회화 자체와 관계맺음이다. 근대예술은 회화 바깥의 무언가를 재현하지도, 가정하지도 않는다. 이 외부의 재현을 거부한다는 개념은 반-플라톤주의다. 반-플라톤주의는 2가지를 의미한다. (1)본질을 찾기를 거부함, (2)자기동일성 유지를 거부함이다. 이 지점이 들뢰즈가 나오는 곳이다. 들뢰르는 존재를 동일성이 아닌 차이와 반복을 통해 규정하고자 했다. 전통적인 철학은 동일성이라는 범주화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실수하지만, 어리석지는 않게 된다.

푸코는 이를 근대예술 분석에 활용한다. 근대예술은 근본적으로 복제인데 이것은 원본을 전제로 유사성을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원본의 지위를 위협하고 대체할 수 있는 '상사'이다. 게다가 동일성을 거부하기 때문에 범주화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아 어리석음을 마주하게 된다. 어리석음은 말 그대로 보면 알 수 있는 형편없는 도덕성이다. 어리석음을 마주하고 구분하도록 하는 게 근대예술의 기능이다.

여기서 푸코가 근대예술의 정체성을 존재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윤리학적 차원에서 분석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플라톤적 관점에서 대상이란 '이데아가 재현된 것'이다. 이는 존재론적 규정으로 윤리학적으로 바꿔 말하면 '이데아를 추구해야하는 것'이다. 근대예술은 이런 측면에서 위 규칙과 연계되어 '본질, 동일성을 거부하는 것', '어리석음을 마주하는 것', '원본을 훼손하고 그 지위를 위협하는 것'등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재현의 붕괴라는 단절로 반-플라톤주의로 넘어가는 계보가 이해하기 쉽다.

근대예술이 반-플라톤주의적이라는 분석은 솔작하게 말하면 이해하지 못했다. 위 내용은 이론적 설명의 초반부를 요약한 것으로 굉장히 부실하다. 일단 들뢰즈 철학이나 환영, 시뮬라크룸 같은 단어에 대한 이해가 안돼서 해석이 불가능했다. 정체성에 대한 윤리적 규정은 뒤에 볼 견유주의적 태도와 연관있는,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우리가 주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7.견유주의적 태도

근대예술에 대한 푸코의 계보학적 최종양상은 특정한 역설을 기반으로 이해된다. 예술작품이 모더니티 안에서 보존하는 진실의 형태는 근대적이지 않고 고전적인 진실의 형태를 모더니티 내에서 부활시킨 것이라는 역설말이다. 이 진실의 양상은 파레시아(진실을 말하기)와 아스케시스(삶의 양식화) 간의 관계다.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고대 그리스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도덕율(규칙의 내용)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도덕적 규범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구성하는 방식(주체화의 방식)은 비교적 쉽게 변한다. 소크라테스, 소피스트, 디오게네스, 스토아 학파의 방식이 다르다.

푸코가 근대예술의 주체화 방식이라고 하는 이 진실의 양상은 진실을 말하고 주체(삶)와 진실을 합치시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각 주체화(삶의 양식화) 방식은 자신의 방식을 '진정한 삶'이라 주장한다. (마치 종교처럼) 진실은 거저 주어지지 않으며, 진실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주체의 구원이다. 그래서 어떤 주체화의 방식이냐? 그것은 개의 삶을 주장한 견유주의의 방식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고대 그리스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도덕율(규칙의 내용)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도덕적 규범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구성하는 방식은 쉽게 변한다. 소크라테스, 소피스트, 디오게네스, 스토아 학파의 방식이 다르다.

견유주의적 파레시아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반대로 보면 편하다.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삶'은 4가지 양상을 보인다. (1)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삶, (2)불필요 혹은 어지럽히는 요소를 배제한 통합된 삶, (3)정해진 법학과 관습을 따르기에 옳은 삶, (4)일관되고 동요를 차단함. 이런 삶이 소크라테스적인 진정한 삶이다.

개의 삶은 마네가 추함을 드러내듯이 관습(관념)을 극단적인 지점까지 끌고 가 경계에 위치시킨다. 디오게네스의 삶, 개의 삶을 보자. (2)가 삶에 나타나는 방식은 금욕주의로 나타난다. 물질적 욕망이 진정한 삶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개의 삶은 이를 극단적으로 끌고가 적극적 가난을 실천한다. 이런 가난은 고대 그리스의 미적 관념과는 반대되는 의존, 굴욕 등을 동반한다. 또한 (1)의 용감하게 드러내기를 아주 극단적인 형태, 거리에서의 삶으로 극화시킨다. 누구나가 그를 보며, 그는 보여지는 것에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과연 이걸 보고도 소크라테스적인 진정한 삶이란 추구하기에 문제 없는가? 이 경계의 지점에서 견유주의는 관습의 변화를 촉구하며 가능성을 연다.

근대예술가들이 갖는 진실과 주체화의 방식이 이렇다. 이들은 작품을 통해 경계에 서있는 진실을 전한다. 이 예술은 변화를 촉구하며 반감을 산다. 근대에 예술가란 사람은 결코 사랑받고자 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은 예술가의 삶을 조명한다. 과연 그들이 자신이 주장하는 진실과 합치되는 삶을 추구하는가?



흔히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것을 보고 '이게 현대예술인가?'하는 비아냥을 한다. 어떤 면에서 이런 비아냥이 예술의 의도일 수 있다. 이해되지 않는 것, 극단에 있는 것을 사고하고, 미지의 열린 공간이 있음을 인지하는 두려움. 푸코가 말하는 근대예술이 전하는 진실이란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형식적인 면에서 변화를 촉구한다. 마치 칸트가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해라."라고 했듯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네 진실과 합치하는 삶을 살아라!"하고 외치고, 견유주의자와 근대예술가들이 "경계에서 사고하고 열린 공간을 바라보아라."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우리 반-플라톤주의의 교훈을 되세겨보자. 당신은 어떤 존재이고 싶은가, 아니면 어떤 것을 추구하는 존재이고 싶은가? 나는 선을 넘고, 지우고, 다시 긋는 사람이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살 것이다. 들뢰즈가 철학을 '개념을 만들고, 사유하고, 해체하는 작업'이라 명명하고 그러한 삶을 살았듯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