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3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14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15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16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
17 지혜의 시작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진실한 소망이다.
18 가르침을 받으려고 염원함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지혜를 사랑함은 그 법을 지키는 것이며
법을 따름은 불멸을 보장받는 것이고
19 불멸은 하느님 가까이 있게 해 주는 것이다.
20 그리하여 지혜를 향한 소망은 사람을 왕위로 이끌어 준다.
21 그러니 민족들을 다스리는 군주들아
너희가 왕좌와 왕홀을 즐기거든 지혜를 존중하여라.
그러면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이다.
지혜서 6,12-21
2 오히려 불이나 바람이나 빠른 공기,
별들의 무리나 거친 물,
하늘의 빛물체들을 세상을 통치하는 신들로 여겼다.
3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4 또 그것들의 힘과 작용에 감탄하였다면
바로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만드신 분께서 얼마나 힘이 세신지 알아야 한다.
5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
6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7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지혜서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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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는 구약에서 가장 헬레니즘적인 문헌임.
비록 개신교 정경에는 포함 안되서(반면 가톨릭 정경엔 포함) 통독 스킵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경성 여부를 논외로 하더라도, 헬레니즘 문화를 유다인들이 소화해내고 승화시킨 아름다운 텍스트이자 헬레니즘 문학의 정수임.
지혜서는 성경으로 볼 수는 없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문학으로는 훌륭한 책이지
교단마다 견해 차이 있음. 가톨릭/정교회에선 정경으로 보고, 개신교에선 외경으로 봄.
나도 가톨릭이고 가톨릭 신학교까지 나오긴 했는데(서품은 안 받았음) 저건 칠십인역에는 있지만 정경으로 보긴 힘듦.. 대부분의 가톨릭 신학자들도 종교개혁 이후에 정경에서 벗어난 이유는 확실하다고 생각함
또 가톨릭/정교회/개신교 관계를 논할 때는 보통 교단이 아니라 교파라고 함
나도 정경성 논쟁의 맥락을 모르는 게 아니고, 스스로 말하긴 낯부끄러워도 신학 공부를 함. LXX의 정경화는 유다교보다는 그리스도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이고, 그런 의미에서 hebraica veritas 원칙에 따라 타낙에만 구약의 정경성을 적용하려는 개신교 견해도 일리가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음. 하지만 정경성 논쟁은 주석학이 학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주석학의 대상도 아님. 특히 고대 교회가 스스로를 '이스라엘'로 생각한 걸 감안할 때, LXX 정경화가 그리스도교에서 이뤄졌다는 게 정경성 부정의 근거가 될 순 없음. 신학 공부했으면 내가 말한 맥락을 모르진 않을 텐데.
그리고 그쪽이 말한 가톨릭 학자가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거임?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주석학에선 정경성 논쟁을 학문으로 해결할 문제로 안 봄. 이건 "가톨릭이면 A라 말하고, 개신교면 B라 말한다" 같은 게 아니라, 기본적인 주석학계의 태도임. 학계에선 정경화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고, "OO는 타낙엔 없고 고대 교회가 정경화시킨 것으로 보임" 같은 말을 하는 게 고작임. 그리고 '교파'란 말은 (종종 경멸적 어조로 쓰여서) 개인적으로 싫어해서 안 쓰는 거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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