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시인데 좀 흥미로운 시더라. 여자의 대답이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라 이슬이 서리될 때가 되면 네가 어찌 버틸 수 있겠냐는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이런 대답은 바로 다음의 꽃의 대답이 말하는 바와 같은 사실을 여자 스스로도 알고 있기에 꽃을 꺾으며 아름다움을 즐기며 슬픔을 달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고시십구수에도 말하기를 "낮은 짧고 밤은 괴롭도록 기니, 어찌 촛불을 들고 즐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지 않았는가?
이 시를 보니 리쩌허우의 <미의 역정>에서 위진남북조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생각나. 한대 시 중에 이런 식으로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한탄하는 시는 적은데, 대부분 후한 말이나 위진시대에 가까워질수록 많아짐. 한대의 특징은 경학이라 할 수 있는데, 경학에서는 음양사상이나 공자에 대한 신격화 등과 더불어 천인감응이라거나 오행을 인의예지신에 대응시킨다거나 하는 등으로 천지인을 하나의 안정된 세계 속으로 통합시키고 있음.
한대 화상석같은 예술 작품을 보면, 가장 위에 천상의 세계가 있고, 그 밑으로 제왕, 관료, 백성 등등이 모두 하나의 화면 속에 자리잡고 있고, 한대의 부를 보더라도 온갖 경물을 극진하게 묘사하고, 유물들 또한 일상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 대단히 많은데, 이러한 것들은 내면성보다는 외면성에 집중하고, 바깥으로 계속 확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줌. 이것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이자 이 생에 대한 긍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 세상에서 장생하여 계속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한대의 신선술 또한 이런 심리와 통하고-,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야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사실에 집중하기 힘들게 됨
그러나 이러한 자심감을 필경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후한 말로 갈수록 경학 세계관이 붕괴되기 시작함. 중앙의 권위가 사라지고 지방의 문벌귀족들이 흥기하기 시작하면서 외면성에서 내면성으로 방향이 돌아가게 됨. 위진남북조 시기에 일어나는 명사들의 예절을 무시하는 망동과 같은 것도 세계를 안정적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던 경학이 무너지자 그것이 선전하던 윤리도덕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이 되고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밖에 없게 됨. 그런 경향이 개인의 각성을 이끌어내서 개성을 중시하고 번문욕례를 무시하고 정을 소중히 여기는 위진풍도로 이어지게 됨
왕희지의 난정집서를 보면, “옛사람이 말하기를, ‘죽음과 삶은 역시 큰 일이다!’ 라고 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생사가 하나라는 말이 거짓임을 알겠고, 장수와 요절이 같다는 말이 지어낸 것임을 알겠다. 후대에 지금을 보는 것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니, 슬프구나!“ 라고 하는데, 이런 탄식이 후한 말기가 되어 많아지고 개성적인 작품이 나오는 것 또한 그와 같은 것이지
대국의 문학은 볼수록 재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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