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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러운 글들이 있다. 저자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점차 세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철학을 두런두런 풀어가며 그 사상과 서사가 점차 분리될 수 없게 합쳐지는 종류의, 두꺼운 글. 누군가는 이 시대에 이런 글을 쓰기에는 너무 낡은 형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글이 고전이 되려면 이 정도의 농도가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을 테다. 꼭 주제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사실 글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주제가 아닐 때가 많다. 저자, 또는 서술자의 시각.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관점. 이것이 주제나 서사와 어우러지면(순방향이든, 역방향이든-<오만과 편견> 같은 제인 오스틴의 글들이 지금의 비평적 명성을 얻은 것은 이 로맨스 코미디 서사를 덮어버리는 냉소적인 관점에 기인한 점이 많을 테다) 명작이 될 확률이 매우 높고, 아예 그 자체가 되어버려도 나쁘지 않다.
<선과>는 여러 의미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되어버리는 괴상한 글인다. 자기 일 하나-모터사이클 정비-에 충실하며 자식과 여행을 떠나는 화자가 자신의 이 행동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을 하나씩 풀어놓다가, 점차 그 사상을 갖게 된 기인스러운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사적으로, 사상적으로, 인격적으로 양분되어 있던 모든 소재들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이 합쳐짐 자체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질Quality" 좋은 세상에 대한 함의나 다름 없다. 공학자 및 기술 친화적인 이들의 고전적 세계와 예술가 및 기술 회피적 이들의 낭만적 세계는 너무나 분리되어 있고, 이 이분법은 지금까지도 너무나 많은 폐해를 가져오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뭔가 근본적인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상 및 관점이라는 게 대체 뭘까?
사실 이 자체는 약간 뻔한 이야기기도 하다. 현대의 분석적 관점이 예술과 기술의 세상을 분리했으며, 합리성의 체계가 사실 그리 좋은 수단이 되지 못하며, 이성과 진리 이전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어떤 좋음, 또는 "탁월함arete"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불일치에 대한 감각은 화자의 과거, 과학을 탐구하고자 했지만 그 방법론에서 괴상한 한계를 느낀-쿤과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철학 느낌이 풍기는 회의주의-과학자가 이후 수사학을 가르칠 때 그 규격화된 우수성의 기준에서 동일한 문제를 발견한 데에서 기인한다. 만일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쓰는 것이 그저 여러 문법 같은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만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대체 우리가 말이나 글에서 느끼는 무엇이 "좋다"는 감각은 왜 이 규칙들과 함께 하지 않는단 말인가? 애초에 우리는 왜 제대로 정의할 수도 없는 "좋음"에 대한 기준을 정식화하고 있는가?
그는 이 철학적 근원을 고대 그리스에서 찾았다. 수사학을 변증법보다 아래에 두는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애초에 변증법을 우위에 둔 플라톤. 그렇게 고대 그리스에서 탁월함이 어떻게 진리보다 아래로 격하되었으며, 애초에 추구해야 할 대상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추리해나간다. (이 점에서는 희극에 대한 비극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장미의 이름>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의 질에 대한 생각은 정의할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벗어난 세계 전체에 대한 감각에 맞닿아 있으며, 무엇이 좋다는 느낌이 그 사람의 배경("뮈토스mythos"로 표현되는, 사람이 태어나 자연스럽게 그 안에 소속되는 어떤 역사, 상식 등의 이야기)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데에까지 맞닿는다. 이런 감각은 누군가의 감정 속에 있는 것도, 그 누군가가 느낀 물체에 있는 것도 아닌, 둘 사이의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기는 하다. 순수 수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공학은 솔직히 그리 취향이 아니다. (몇몇 대학들이 수학을 Liberal Arts 분과 속에 넣어둔 것도 그런 맥락에 있지 않나 싶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수학의 문제를 푸는 것은, <선과>에서 푸엥카레의 예시를 이야기하듯 이성 이전에 찾아오고 이성의 언어, 수식으로 정식화되는 쪽에 더 가깝다. 현대에 기계가 점차 자신의 내부를 최대한 감추고 매끄러운 크롬으로 자신을 감싸 정해진 기능만을 제공하도록 규격화된 것도 그런 점에서는 당연하기도 하다. (<기계비평>은 그 점에서 이율배반인데, 기계에 대한 온갖 정보들을 늘어놓는 글에서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저 저널리즘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이 개개인이 느끼는 그 좋음에 대한 감각, "질"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게도 이전에 읽은 책과 통하는 바가 있다.
<단독성들의 사회>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80년대 이후 현대 사회의 변천사 및 그 변화의 핵심을 분석하는 책인데, 이런 종류의 반발이 근대 기술로 가능해진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하여 그저 기능을 잘하는 것 이상의, 어떤 독립적인 가치를 가진 무언가에 대한 추구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를 "사회의 문화화"라는 키워드로 정식화하고 사회학적 기원과 실제 사례들을 분석하는 <단독성들의>를 읽고 이를 읽으니, <선과>의 저자가 성공을 거뒀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비록 너무나 우연적이고 히스테릭하지만) 질의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P. S. 관념적인 부분이 더 궁금하다면 저자의 후속작인 <라일라>를 읽어보라는 저자의 한 마디. 그렇지만 이 책을 인상 깊게 읽은 것과는 별개로 질에 대한 형이상학을 마저 읽을지는 조금 애매하다.
비슷한 문제를 지적하지만 탁월함에 대한 감각을 그닥 강조하지 않는 로티 읽어요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는 읽을 계획임 - dc App
<실용주의의 결과>에 실린 <잘 잃어버린 세계>도 괜찮음
내가 예전에 쓰려고 한 글 중에 "DFW의 문화 비판을 생각할 경우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전혀 지지할 수 없다"가 있었음. 뭐 여러저러 이유로 취소하긴 했지만. (실제로 D 그분 어머니가 이 책을 좋아했는데 자기가 청소년기에 읽을 때 이거 싫어했다는 인터뷰도 있었고). 이 책은 문학과 철학을 엮은 것으로는 좋은 책, 아들과의 여정으론 너무 편안한 책이지만, 철학적으론 도저히 아님. 그렇게 arete로 싹 치워버리는 게 어떻게 해피엔딩인데? 애초에 데리다의 파르마콘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의 부분을 그저 빌려온 것일 뿐임.
뭐 나도 철학적으로는 큰 관심 없어서 추신으로 달아놓긴 했지만... 이런 생각의 일상화로는 솔직히 데리다의 파이드로스 독해보다 훨씬 잘 먹힌 셈이라고 생각 - dc App
이런... 데리다 부분은 다른 문장들과 거의 관련이 없어서 빼려고 했음. 아무튼 내가 너무 철학적으로만 본 거겠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