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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궁배미」



    세 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네.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


  농부가 속의 이 귀절을 보면, 모 심다가 남은 논을 하늘에 뜬 반달에다가 비유했다가 냉큼 그것을 취소하고 아무래도 진짜 초생달만큼이야 할쏘냐는 느낌으로 고쳐 가지는 농부들의 약간 겸손하는 듯한 마음의 모양이 눈에 선히 잘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이 논배미 다 심고서 걸궁배미로 넘어가세.


하는 데에 오면


    네가 무슨 걸궁이냐, 무당 음악이 걸궁이지.


하고 고치는 귀절은 전연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 걸궁배미라는 논배미만큼은 하나 에누리할 것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무당의 성악이요, 기악이요, 또 그 병창인 것이다. 그 질척질척한 검은 흙은 물론, 거기 주어진 오물의 거름, 거기 숨어 농부의 다리의 피를 빠는 찰거머리까지 두루 합쳐서 송두리째 신나디신난 무당의 음악일 따름인 것이다.

  그러고, 걸궁에는 중들이 하는 걸궁도 있는 것이고, 중의 걸궁이란 결국 부처님의 고오고오 음악, 부처님의 고오고오 춤 바로 그런 것이니까, 이런 쪽에서 이걸 느껴 보자면, 야! 참 이것 상당타.



- 『질마재 신화』(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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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서정주시선』에 실린 여러 작품 가운데 「학」이 잘 거론되지 않는 것은 다른 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난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위의 시 역시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투 위주의 『질마재 신화』에서 상대적으로 난해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고 그 때문에 별로 거론되지 않아 왔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시의 내용에 앞서서 '걸궁배미'라는 제목은 우선 독자에게 생경한 기분을 준다. 걸궁은 물론 배미라는 말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겠지만, 더욱이 이를 합친 '걸궁배미'라는 어휘 또한 모르긴 몰라도 시인이 살았던 지방의 표현으로서만 구사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간단히 찾아보니 민요 속에서 해당 구절은 '장구배미' 혹은 '건너 배미'로 불리는 판본이 우세한 것 같고 '걸궁배미'로 쓴 경우는 찾기 어렵다. '걸궁배미'란 아마도 시인의 지방에서 '장구배미'나 '건너 배미'가 변형된 표현이 아닐까 한다. 


시 속의 주장은 명쾌하다면 명쾌하다. 농부들의 시각에서 반달만한 논배미는 진짜 반달만 못하지만, 걸궁배미는 진짜 걸궁과 같은 값의 의미를 지니는 논배미라고 여겨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때 농부의 논배미와 무당의 걸궁은 고되고 또 더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의 어떤 진실성과 긍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헷갈리는 것은 마지막 행이다. 시인은 걸궁 중에는 '중들이 하는 걸궁'도 있다는 점을 굳이 강조한다. 이것은 그가 불교 정신과 농민들의 사고를 연결 지으려 한 것임을 뜻한다. 범패가 부처의 클래식이라면 걸궁은 부처의 고고다. 전자만이 아니라 후자까지를 부처 말씀의 일종으로 쳐준다는 것은, 부처의 말씀으로 비유된 삶의 진실성 속에 속된 것, 더러워 보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향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중의 걸궁'을 '부처님의 고오고오 음악'이라고 칭한 비유에 대해서는 황동규가 『질마재 신화』에서 몇 안 되게 재미를 느낀 구절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