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의 세계, 벽에 둘러싸인 도시

작품 전면에 등장하는 도시는 무슨 의미일까. 도시는 와 만나면서 만든 세계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곳이다. 그리고 사랑했던 , ‘의 실체가 영원히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 속 사람들은 시간이란 개념(생성과 소멸의 개념)이 없이 살아간다. 그곳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해서 도시 밖의 이물질이 유입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자신을 둘(그림자와 본체)로 나누는 것이며 도시 밖으로 탈출하는 것은 미지의 강물을 통해야만 한다. 이 강물을 통해 빠져나오면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강물을 통해 빠져나온 것은 그림자였지만, 그림자는 이를 기억하지 못함). 무엇보다 그 도시는 회색빛의 이미지다.

나는 도시의 묘사를 읽으며 플라톤의 이데아(Idea)계를 떠올렸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원래 우리가 있던, 세상의 본질인 곳이다. 그곳에는 생성과 소멸이 없으며, 따라서 완전무결한, 관념의 세상이다. 감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이데아계에서 현실계로 이동할 때, 즉 태어날 때 우리는 레테(lethe)라는 망각의 강물을 건넌다. 플라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세계는 이데아가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데아에 비해 열등하며, 거짓이고, 무가치한 것이다. 플라톤의 분리, 이분법이다.

만약 본질이 있다면, 본질에 맞게 행동하고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다. 따라서 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 본질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이 목적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은 악한 삶이다. 이런 삶의 태도가 책 중후반까지 가 가진 삶의 태도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 있는 곳을 꿈꿔왔으며 동시에 삶을 향한 의지가 퇴색되어 갔고 그저 그런 삶을 사는 것에, 그 순간들이 반복되는 것에, 톱니바퀴와 같은 삶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로서의 삶

그림자는 의 삶을 대신한다. 사실 나와 그림자는 하나였으므로 삶이나 정체의 연속성에 흠이 가지 않는다. 그림자가 세상에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주목받을 만한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톱니바퀴 같은 삶을 멈추는 것이다. ‘이 현실이 나를 위한 현실이 아니다라고 느껴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꿈속에 나온 도서관을 찾는다. 그는 시골(작품 내에선 후쿠시마)에 있는 도서관에 관장 자리로 취직한다. 그 전의 삶, 그림자 이전의 삶은 단순한 묘사로 지나가는 반면 작품 대부분이 그림자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후쿠시마의 작은 마을에서 그림자는 누구보다 생생한삶을 사는 듯 보인다. 그곳에서 그는 고야스 씨, 소에다 씨, 옐로 서브마린 소년, 마을 사람들, 정을 나눴던 카페 여주인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때로는 의문을 품기도, 자신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영락없는 우리의 삶이다.

-1 유령 도서관장 고야스

고야스는 유령이고, 따라서 관념적인 존재이기도 하며 현실 세계의 법칙과는 어긋나있다. ‘는 고야스에게 많은 조언을 구하고 받는다. 그 조언 중 하나가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은 것. 한평생이라야 지나가는 그림자”(p358, 시편 인용)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중략)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p452)라는 것이다. 그다음 고야스는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라고 말한다. 이 발언은 후에 옐로 서브마린 소년으로부터 되풀이된다.


-2 옐로 서브마린 소년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현실 세계에선 극도로 말수가 없는 아이지만, 도시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가 고야스 무덤 앞에서 고해성사하듯 내뱉은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선 지도까지 그려 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와의 대화를 통해 도시의 벽이 역병을 막기 위해세워졌다고 말한다. 이 역병은 끝나지 않는 역병이고 영혼이 앓는 역병이다(p527).

작가 후기에도 등장하듯이 이 작품이 쓰인 것은 코로나 시대다. 역병은 전염병으로, 어느 한 국소 부위에서 시작해서 퍼져나간다. 맨 처음에는 그저 신체적인 발병으로 인해 위험해졌다면 그것을 격리·분리하고, 차단하는(벽을 세우는) 과정에서 마음에까지 마수를 뻗쳤다. ‘코로나 블루, 코로나 블랙이라는 신조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로 인해 전염병은 신체적인 질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질병까지 야기시켰다. 그리고 마음의 병은 재발하기 더더욱 쉽다. 도시에 세워진 벽은 마음이 앓는, 이런 병을 차단하기 위해 혹은 도시 안에 있는 무언가들을 외부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세워졌다.

그리고 소년은 그 도시에 가야 해요라며 에게 도시에 데려가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는 자신의 의지로 도시에 갈 수 없다. 맨 처음 도시에 갔을 때도 뜻하지 않게 눈을 떠보니 도시였고, 도시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도중 소년은 갑작스레 실종된다. 현실 세계에서 실종된 소년이 발견된 것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다. 그 도시에서 소년은 에게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꿈 읽기, 소년과

소년은 와 하나가 되어 꿈을 읽고자 한다. ‘꿈 읽기가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 맡아야만 했던 작업이며, 도시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꿈 읽기는 외부로부터 차단된 도시에서 이뤄지는 가장 외향적이고 가장 중심적인 활동이다. ‘는 꿈을 읽기 위해 눈에 상처를 냈다(눈에 상처를 낸 것은 감각적인 세계와의 차단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꿈은 불특정 다수의 꿈이다. 말 그대로 꿈일 수도 있고, 염원이나 소원일 수도 있다.

와 소년은 하나가 된 이후, 꿈 읽기 작업을 같이 한다. 그 작업을 하면서도 기회가 될 때마다 내 의식 밑바닥에 있는작은 방에서 만나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던 도중 는 내 안에서 어떤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소년은 이에 당신이 이곳을 떠날 때가 왔다고 말한다. 이곳을 떠나는 걸 필요로 한다고. 이에 덧붙여 내가 나 자신의 본체건, 그림자건, 어느 쪽이 됐건 지금 이렇게 여기 있는 내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가 곧 나인 거죠.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중략) 당신은 당신입니다.”라고 말한다. 도시를 떠나는 방법도 말한다. “마음으로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중략) 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 당신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처럼 굳이 그 웅덩이까지 찾아가 몸을 던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분신이 그 용감한 낙하를 바깥 세계에서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p754) 그리고 가 도시를 떠난다고 다짐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