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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아오이가든>을 읽었을 때의 기억을 생각해보면 참 묘하다. 당시에 나는 아직 글이 이렇게까지 역겨울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고, 어릴 때 이토 준지라는 이름조차 모르고 이토 준지의 단편을 봤을 때 받은 충격을 새로이 받았다. 이후 그 경험은 만화 이상으로 역겨운 여러 영화들을 제외하면, 윌리엄 버로스나 어빈 웰시의 역겨운 묘사를 볼 때까지는 딱히 갱신되지 않았는데, <황니가>를 읽으며 어쩔 수 없이 그 이름들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을 정도로 불쾌하고, 역겹고, 더러운 이미지들이 가득한 이 황니가(누런 진흙 거리)는 도저히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리기 쉽지 않은 세상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리다가 강물에 흘러들며 오수가 이따금 범람해 집 문 앞을 적시고, 밥을 푸면 밥알 사이사이에 구더기와 함께 벌레들이 가득하며, 조금이라도 상처가 긁히면 순식간에 부르트고 문드러져 진물이 흐르거나 뜯어져버리고, 뿌연 하늘 속에서 뜨겁게 작열하는 자그마한 태양은 이 모든 것을 서서히, 그러나 벗어날 수 없게 부패시킨다. 아무 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 속에서 공장은 무엇을 위해서 만들어지는지도 모르는 쇠구슬들을 쏟아내고, 조금이라도 마을의 본질에 파고들려 해봤자 무언가 수상한 것을 포착하고 책잡으려 드는 상부의 관료로 인식되어 발작적인 두려움과 함께 혁명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로 그 시도가 끝난다.



찬쉐가 중국의 카프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그 평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진정한 의미에서 관료제의 어둠을 그리지는 않았다. <성> 및 <소송>이 그려내는 모습은 모든 것들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에 가까우며, 그 한가운데의 인간이 소외될 수는 있더라도 전체 시스템이 무너져내리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황니가>는 인간의 악몽이 아닌 체제의 악몽에 더 가깝다. <황니가>를 시작하며 꿈 속에서 이 거리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한 국가의 체계 속에서 늘 짐작은 하지만 상상하지 않으려고 하는 틈새, 찌꺼기를 빗자루로 쓸어내며 밀어 넣고 말끔한 표면을 정리하는 동안 그 찌꺼기가 밀려 들어가 썩어가고 있는 틈새를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이 부패한 진흙의 거리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역겨운 냄새를 풍긴다.



덕분에 옌롄커의 <딩씨 마을의 꿈> 같은 책은 또 <황니가>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글들은 결코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 자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외려, 라슬로의 <사탄탱고>와 함께 보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유예되고 그 어느 것도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는, 메마르고 폐쇄된 세상. <사탄탱고>가 시계 같은 구성으로 자신으로 되돌아오며 폐쇄성을 강조하듯, <황니가> 역시 이 마을의 유일한 꿈이라고 할 만한 왕쯔광이라는 개념이 글 속에서 서서히 부패해가며 결국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모습을 통해 온 세상의 몰락을 그려낸다. 이 몰락은 결코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으며-그런 낭만적인 죽음은 사실 죽음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를 통한 영생에 더 가깝다-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영락한 형태의 지속을 통해 이뤄진다.



영웅의 가장 큰 적수는 세월이라는 말이 있다. 락 스타의 경우에는 이것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나는데, 액슬 로즈의 뚱뚱한 모습과 후줄근한 아저씨 마릴린 맨슨이 여전히 뭔가 기믹을 잡으려고 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세월 속에서 부패한 스타, 이상적인 형태에서 그저 한 사람으로 물러버린 좋은 예시다. 그러나 가장 좋은 예시는 아마 마이클 잭슨의 죽음일 텐데, 그 묘하게 아이 같고 중성적인 모양새로 관객들에게 '꿈'을 안겨주던 팝 음악 산업은 외려 그의 서서히 다가오는 부패를 젊음과 백인에 대한 강박으로 포장하게끔 했고, 결국 죽음 이후에도 그를 '되살리려는' 여러 시도를 통해 이런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팝 산업의 핵심 동력 중 하나-이 무한한 젊음에 대한 유혹-가 부패해버렸다. 더 이상 우리는 마이클 잭슨 같은 팝 스타도, 이를 만들어내는 종류의 산업도 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