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학자: 나는 내 작품 안에 자리 잡지만, 작품은 그것을 모른다. 내가 나의 글에 애착을 가질수록, 나는 내 글의 원천과 단절된다. 내가 진심이고자 할수록, 더 빠르게 나는 말의 주도권을 포기해야 한다. 나는 말들이 나 없이 존재하고자 하는 것을 거부할 수가 없기에.

그래도 나는 그 말들의 존재의 기원이다. 따라서 나는 그 언어적 존재를 품어낸 자요, 그 존재는 내 작가로서의 운명이 의지하게 될 제 자신의 운명을 갖게 되리라.


한 사람의 학자: 나는 글을 쓴다. 그리고 곧, 나 자신을 벗어나는, 그리고 내가 그 덕분에 존재하는, 단어가 된다. 단어는 단어로 이어지고, 그렇게 스스로를 드러낸다. 가지들로 인해 뻗어나가는 나무처럼, 나는 문장과 함께 증식한다.


한 사람의 학자: 표현되지 않은 사유는, 말을 말과 엮고자 하는 희망이며, 제게 각인된 형태를 찾는 기호들의 기다림이며, 이론의 여지가 없는 힘의 가능성 또는 불행의 수용이다.


한 사람의 학자: 나는 나를 다시 그려내는 몇몇 글자들과 함께 알파벳들로 칸이 나뉜 우주를 돌파한다. 그런데 존재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러한 의지의 언어적 표현 사이는, 지각과 확인된 단어를 통한 그 지각의 자연스러운 전달 사이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나인 것은 이제 나 없이 존재할 나에 다름 아니다.


(...)


한 사람의 학자: 처음에 나치는, 쓸모없는 유대인들만을 화장터의 가마로 보냈다. 나중에는, 이 '쓸모없음'이란 개념조차 파기되었다. 모든 유대인들이 몰살되어야만 했다.

어쩌면 언젠가는, 단어들이 영영 단어들을 잃게 될 날이 오리라. 시가 죽는 날이 오게 되리라.

그것은 로봇의 시대, 그리고 옥에 갇힌 말의 시대리리라.

유대인들의 불행은 보편적인 것이 되리라.


유켈: 유대인들의 불행은 불행을 무장해제할 것이다.


-

그리고 유켈은 말한다.


-우린 서로 같은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같은 기호나 같은 단어가 아니라 우리가 그 기호나 단어에게로 옮겨놓는 정념이 우리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렙 바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는 그대 나라의 작가이다. 주님께서는 우주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신다.


유켈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주님의 언어로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내 말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말의 침묵이시기에.


(렙 앙마르는 이렇게 말했다. "우주는 책의 문간에 있다. 문간 너머에는, 우주를 탐색하는 단어들이 있다. 태어나 눈을 뜨면서, 우린 세상을 발견했다. 지금 우리는, 그 세상을 찾고 있다.")



에드몽 자베스 - <질문의 책> 中




시로 볼 수도 있고 소설로 볼 수도 있고.. 그냥 책으로 퉁치는게 편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