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는 기호는 끔찍하다.—내가 말한 바로 그것—끔찍하게도 부드럽고도 연약한 것, 끔찍하게도 헐벗고 단정하지 못하다. 전적으로 가장된 낯선 떨림이며 전적으로 순수한 자아의 상태다. 하지만 자아의 순수성이란, 모든 것의 종말로 향하는 것이며 '나'를 완전한 어두움 속에서 밝혀 냄과 동시에 어두움 속에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 최후의 나는 죽음을 놀라게 할 것이며, 그 죽음은 또한 이 순수성에게 마치 금지된 비밀처럼 표류와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발자취와 모래 위에 열린 입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꿈쩍도 하지 않는 말들이다. 내게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 그 말들을 가볍게도 무겁게도 만드는 건 이 부동성 때문인가?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가벼운 말들이다. 그 말들이 왔다 가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말들이 살아 움직일 생생한 공간도 없이 그 말들을 고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겐 너무도 가벼웠다.

--

그것은 웅성거림이다. 더딘 불은 그 웅성거림을 따라 다른 세계를 다 태우고, 어느 한순간에 그것을 내적 운동으로, 내밀한 단일성으로 드러나게 한다. 그 불은 거대한 건축물의 생생한 설계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타오를 뿐이다. 불은 단일성을 통해 건축물을 무너뜨리며 건물을 태워서 건물을 드러나게 한다. 위대한 건축물은 단일한 빛 속에 모든 것을 계시하기 위해 중심의 불을 꺼뜨릴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이 타는 그 순간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활동하던 무수한 개개의 화덕에서 우연한 순간에 즐겁게 소멸된다.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각각의 불들이 지닌 차가운 열정과 함께. 우리는 불의 문자로 만들어진 빛나는 기호가 될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계 쓰였지만, 오로지 내 안에서만 읽히고 웅성거림으로 공동의 확실성에 대답하는 것이다.—오래 전에,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존재했던—이러한 믿음은 너무 희미해서 거의 꺼져 가는 불의 고통과 슬픔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 여겨진다.

--

나중에 그는 자신이 어떻게 고요 속으로 들어왔는지 의아해했다. 자기 자신과는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오로지 말들의 관계 속에서 자각하는 즐거움만이 있을 뿐이다. "나중에 그는⋯."





혹은 블랑쇼의 시간


<최후의 인간>, 재독할수록 감탄이 나온다


서사는 붕괴하고, 인식과 사유는 도약하며, 등장인물들에게 의지하기는커녕 '나'와 '너'의 구분조차 불분명하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기에 가능성의 광장이 펼쳐지는 대신 활자의 미로 벽을 더듬거릴 뿐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글쓰기, 그렇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