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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영적인 것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신들에게 불경을 저지르고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명목으로 기소당했다. 다른 한편에는 에우티프론이라는 사제가 있다. 그는 아버지의 과실치사 혐의를 고발했다가 불경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둘을 묶는 공통점은 '불경함', 즉 경건하지 못함이다. 그런데 같은 불경죄를 지었지만 이들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과연 무엇이 경건함인가?


「에우티프론」 속 대화는 이 두 사람이 스스로 '경건함'을 정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자의 행동이 과연 불경한지 판단하기 위해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사제이므로 경건함에 대해 잘 안다고 확신하던 에우티프론은 의견을 낼 때마다 소크라테스에게 조목조목 반박당한다. 결국 에우티프론은 '경건함은 모든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찝찝한 말을 되풀이하다가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한다.


이 대화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언어는 중의적이기 마련이다. '경건함'만 해도 여러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모두에게 똑같이 뜻을 전달하려면 의미는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특히 「에우티프론」의 상황처럼, 윤리에 관한 단어(경건함)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라면 언어 사용을 더욱 정확하게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정작 '경건함'의 분명한 하나의 뜻은 사제인 에우티프론조차도 모르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렇다면 과연 '경건함'이라는 모호한 말이 죄인을 정하는 잣대가 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경건함이 무엇인지 안다고 확신하던 에우티프론을 이렇게 비꼰다. “만약에 당신이 경건함과 경건하지 못함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면, 머슴을 위해서 늙으신 아버지를 살인죄로 기소하려 들 수는 없었겠소. 오히려, 당신이 이 짓을 하는 게 옳지 못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여 신들이 두려워서 모험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도 창피스러워졌을 것이오.” 그는 확신에 차서 아버지를 살인죄로 기소했지만 정작 경건함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도 없었으니, 경건함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밝혀진 그의 기소 또한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기소한 자들에게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에우티프론」은 내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 하나는 '정확한 앎의 중요성'이다. 내가 명목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 이해하지 못했다면,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진정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내 행동의 무게를 조금 더 신중하게 고려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둘째는 '정확한 앎의 어려움'이다. 확신을 깨는 것도 어렵고, 그 안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도 어렵다. 내 이성의 적은 내 옛 이성인 것이다. 나는 유동적인 자세를 가지고 비판들을 인정하는 자세를 연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