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막스 브로트라는 인물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카프카의 절친이자 유언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불태워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브로트는 유언을 어기고 카프카의 작품들을 세상에 출판하기에 이른다. 덕분에 카프카의 미완성 장편들, 미출간 단편들, 각종 일기와 편지들은 빛을 보게 되었고 훗날 실존주의 선구자로서 카프카는 추앙받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브로트는 스스로 카프카의 작품들을 분석하고 연구하며 유럽 전역에 그의 소설들을 퍼트리도록 노력하고 그로 인해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브로트의 견해는 아직도 카프카 연구에 중요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유언을 어긴 카프카의 친구 덕분에 카프카의 소설들을 즐기고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쿤데라는 자신의 에세이집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들이 그릇되게 받아들여지는 광경을 씁쓸히 보는 모습에 대해 얘기한다. 제목 그대로 유언들은 배신당하고 주변 사람들, 출판사, 학자들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쳐진 작품들을 보며 쿤데라는 유감을 표한다. 작가의 작품은 여러 방식에 의해 왜곡된다. 단순 농담이 지나치게 큰 의미 부여에 의해 망언이 되기도 하고 번역자들의 기량 뽐내기에 원문의 의도가 훼손되기도 한다. 과도한 해석에 의해 텍스트가 철학서로 변모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의도를 가지고 잘라내 부분이 대중들의 알 권리라는 미명하에 작품에 섞여 들어가기도 한다.


 쿤데라는 에세이 중간 중간 카프카를 예로 들며 이를 설명한다. 독일어 원문에서 카프카는 3장, 프리다와 K가 주점 바닥에서 뒹구는 장면,의 문장에서 ‘낯섦’이라는 어휘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어 판에서는 ‘낯섦’이 ‘망명으로 질식할 듯 한 곳’으로 바뀌는 등 역자 스스로 과도하게 어휘 변경을 한다고 쿤데라는 이를 비판한다. 작가의 의도적인 단어 반복이 역자의 어휘 뽐내기에 희생되었다고 말이다.


 막스 브로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쿤데라는 브로트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카프카 해석 체계를 비판한다. 미학적으로 접근해야할 카프카의 텍스트가 브로트에 의해 성전으로 변모하고 카프카가 아닌 카프카학을 탐구하는 모습을 말이다. 브로트에 의해 동시대의 작가들과 소설의 변모 과정에서 연구되어야 할 카프카의 소설들이 아버지와 연인들이 들어찬 축소된 세계에서 해석되는 광경을 쿤데라는 ‘가르타(브로트가 쓴 스스로와 카프카에 대한 모델 소설에서 브로트를 지칭하는 인물)의 망령’이라 부르며 지적한다.


 에세이집 속 마지막 에세이의 제목은 <이보시오, 여긴 당신 집이 아니오.>이다. 제목 그대로 쿤데라는 다른 사람들에게 타인의 집에서 나가라고 요구한다. 한 작가와 작품이 가득한 집에서 말이다. 더 이상 사람들이 작가의 말을 듣지 않는 세상에서 간섭 말라고 작가의 철학을 존중하라고 쿤데라는 그렇게 말한다.


 책을 보다보며 한 가지 씁쓸한게 있다면 점점 쿤데라의 주장이 무시되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처음 나오는 에세이 <파늬르주가 더는 웃기지 않는 날>에서 쿤데라는 세르반테스 시절의 유머가 가득한 소설들을 회상한다. 사회적 도덕의 틀을 벗어나 소설만의 도덕으로 독자들을 웃게 하는 시시한 농담으로 가득한 소설들 말이다. 쿤데라는 오늘날 더 이상 이런 농담들이 농담이 아닌 진지한 언어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마음 졸이며 지켜본다고 말한다.


 오늘날 사회는 더 이상 소설가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들이 쓴 글은 음소 하나하나 분석되어서 혹 불편한 점이 있다면 이의가 제기된다. 출판사는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고 멋대로 글들을 엮어 출판한다. 소설가들의 소설은 소설 그 자체로서 미학적인 텍스트가 아닌 자본으로 선언문으로 논설문으로 둔갑하여 사회의 시험대에 오른다. 쿤데라가 두려워하던 시대는 이미 왔다. 소설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다.






쿤데라 이 양반은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재밌음. 소설도 좋지만 아니지만 에세이는 읽다보면 뭔가 깨어나는 기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