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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자 내가 싫어하는 소설이다. 삶이란 어떤 것인지 진솔하게 말해주는 면이 좋지만, 그 진솔하게 말해주는 삶의 모습이 싫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을 읽고 피어오르는 감정마저 모순이다. 모순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관통하는 단어이다. 참 좋은 제목이다.
주인공인 진진은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이런 선언을 한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그녀의 삶은 늘 외부의 요구에 따라 움직여왔고, 심지어 그녀의 의지 자체가 외부의 요구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삶에 양감을 부여하려 한다. 자신을 운영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는 것이다. 진진은 독자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진진은 우선 자신의 배경으로부터 자신이 추구해야 할 행복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진진의 배경에는 두 축이 있다. 하나는 진진의 가족이다. 진진의 가정은 가난하고 불행하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오는 어떤 구속도 참을 수 없다며 가정폭력을 저지르다가 집을 나갔다. 동생 진모는 자신의 삶으로는 원하는 여자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열심히 비디오를 돌려 보며 조폭의 삶을 연기한다. 그리고 그 삶이 진정 자신의 것이라고 믿기까지 한다. 진진의 어머니는 이 모진 불행을 감당해내려 애쓴다. 물론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자신의 소소한 불행들을 과장시킨 다음 그것을 빠져나가고 그런 자신에 도취되는 '불행의 과장법'을 구사하며 삶을 악착같이 지탱한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라고 진진은 생각한다.
또 다른 축에는 어머니와 쌍둥이인 이모네 가족이 있다. 이들은 독자인 내가 봐도 부러울 정도로 잘 산다. 진진의 집은 일 년에 몇 번 외식을 하는 것조차 치열한데, 이모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여유가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이모의 두 자녀는 미국에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고, 이모부는 꿋꿋이 이모를 챙긴다. 그런 삶을 원 없이 향유하는 이모는 중매를 받을 때 자신보다 10분 먼저 태어난 진진의 어머니에게 순서를 양보했기 때문에 그런 이모부와 맺어졌다.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으로 모든 것이 같던 두 쌍둥이는 집도 달라지고 사는 모습, 보여주는 모습도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모는 불행한 사람이다. 기만이 아니다. 그녀는 탄탄대로를 걷고 있어서 탄탄대로 바깥의 것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는 가정에 신물이 나고 있다. 너무도 평탄한 인생이, 아무런 고비가 없어서 아무런 추억도 생기지 않는다는 모순이 이모를 괴롭히는 것이다.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라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모는 '행복의 과장법'을 구사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여서 새로울 것 없는 일상 속 모든 순간에 큰 행복을 욱여넣어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진진은 이런 배경을 밑에 두고 두 남자를 저울질한다. 자신의 행복을 결정할 수단,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이다. 한편에는 장우가 있다. 장우는 진진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가정에서 산다. 그러나 장우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그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 장우는 진진의 의사를 들어주고, 진진에 대한 사랑을 계속 내비친다. 풀꽃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인 장우는 희미한 모든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진에 대한 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반대편에는 영규가 있다. 영규는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제법 잘 사는 것 같다. 그는 진진을 기쁘게 하기 위한 계획을 고심 끝에 철저히 짜놓는다. 영규와의 만남 사이에서 진진은 고민도 없고 쉴 틈도 없다. 그러나 영규는 진진보다는 자신이 세운 계획을 더 사랑하는 티가 난다. 진진을 사랑해서 진진을 위해 계획을 짰다기보다는, 자신의 인생 계획에 진진이 적합해서 진진을 위해 계획을 추가한 인상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영규는 진진을 위해 짠 자기 계획이 틀어지려 하면 조바심을 보인다. 여기서 진진은 이모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권태를 느낀다. “이 남자와 같이 지낼 앞으로의 네 시간에 대해 아무런 궁금증이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진진은 물론 장우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러나 진진은 자신이 장우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행복함보다는 공허함을 느낀다. 진진은 장우를 사랑하므로 장우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것이 구속이 되어 진진은 자기 가정사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지 못한다. 진진은 독자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을 보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진진은 역설적으로 의사(擬似) 사랑을 하는 영규에게만 솔직해질 수 있다.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구속을 느끼지도 않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진진을 둘러싼 불행은 더 커져만 간다. 결국 진모는 감옥에 갔다. 사랑을 체험해 본 진진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버지를 맞을 준비를 하지만 돌아온 아버지는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모는 자식에게도 남편에게도 삶에게도 더 기대할 것이 없어서 스스로 삶을 끝낸다. 남은 것은 이모의 죽음과는 별개로 변함없이 탄탄대로를 걸을 이모네 유가족과 악착같이 삶을 이어가는 진진의 어머니뿐이다. 진진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 진진은 마음이 끌리는 김장우를 고르려 했다. 그러나 행복한 줄만 알았던 이모의 불행이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바람에 진진의 생각도 바뀐다.
그녀는 영규를 골랐다고 밝히며 이렇게 자신의 선택을 설명한다.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이모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아야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모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김장우의 손을 놓아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진진은 독자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독백을 끝낸다. 이 말은 진진이 처음에 했던 당찬 선언과는 사뭇 대조되는 말이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진진은 나와 비슷한 또래이다. 그리고 진진이 처음에 털어놓은 소망은 내가 품었던 소망과 비슷하다. 나 또한 행복을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의 만족에서 찾았던 시절이 있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 나는 그래서 진진이 자기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이 무척 궁금했다. 자신을 탐구하며 느낀 것과 그 결론이 궁금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한지 1년, 그동안 진진이 느낀 것은, 삶을 한 방향으로만 재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모의 행복 같던 불행을 보고 그것을 크게 느꼈을 것이다. 작가 노트에서 작가가 제시한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같은 상반되는 개념들은 실은 삶 속에 공존한다. 다만 어느 한 쪽만 보려 하기 때문에 한 쪽만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해석에 있다.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한쪽만 보는 인간은 사람을 전부 해석하지 못해서, 사람의 모순을 인지하지 못해서, 남의 불행한 삶을 그렇게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가하는 구속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진리를 깨우쳐주는 「모순」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그래서 장우 대신 영규를 고른 진진의 선택을 존중한다. 죽음은 가르침을 줄 수 있도록 충분히 무거운 사건이다. 진진이 겪는 불행과 장우가 겪는 불행은 비슷하다. 반면 영규에게는 진진이 갖고 있는 고민이 없다. 진진이 자신과 통하는 장우를 골랐다면, 그 둘은 서로에게 행복했겠지만, 너무 닮은 둘이서 활로를 찾을 수 없는 현실에 짓눌리기도 했을 것이다. 비슷한 불행들이 만나면 똑같은 불행이 가중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모순」을 싫어하는 이유이다. 나는 닮은 불행을 가진 사람끼리 껴안고 세상의 추위를 버티는 이야기를 믿고 있다. 이들에게 볕들 날이 언제일지, 그런 날이 오기나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며 악착같이 살면, 언젠가는 자신들이 이룬 것에 그런대로 흡족해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진진이었다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 하며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장우를 골랐을 것이다. 진진은 장우와 자신의 불행이 비슷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진진은 장우가 느끼는 행복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듯하다. 소소한 것들을 사랑하는 장우의 아름다운 마음은 분명 어디서든 사랑할 대상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장우는 그 소소한 것들의 사랑을 모아 자신도 행복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진진도 그런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 조금은 안타깝다.
나는 「모순」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은 진진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인생은 솔직히 전혀 부럽지 않다. 불행으로 점철돼있기도 하고, 그 속에서 고상한 티가 흐르는 이모와 많은 것이 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삶에 대한 의욕을 꾸준히 불태울 수 있다는 점에서 어머니의 삶은 이상적이다. 어머니는 불행의 과장법을 구사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 그 불꽃을 보며 자신 또한 희열을 느낀다. 이 행복을 두고 과연 어머니의 행복이 어머니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렇게 느끼는 한, 남이 왈가왈부할 것은 못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위해 삶을 모질게 바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게 가정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진진의 인생은 어디로 향할까? 그보다, 진진의 인생을 본 내 인생은 어디로 향할까? 나는 진진이 '인생은 탐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탐구하는 것'이라고 한 것을 아직 믿지 않기로 했다. 행복과 불행이 한 몸으로 모순을 이룬다면, 마찬가지로 인생과 탐구 또한 한 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진진의 결론을 인생에 대한 체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쨌건 그녀는 나름대로 탐구를 해서 배우자를 골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탐구 끝에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며 사는 삶을 지속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세상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그렇게 세상이 선택지를 좁히는 과정에서도 나는 계속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 테니까.
나는 생각 끝에 내가 고르고 싶은 것을 고르고, 희망을 놓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고,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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