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치료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복도로 나와 쓰레기통에 약솜을 뱉고 피가 섞인 침을 여러 번 또 뱉어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아침마다 정류장에 서서 기다리던 여학생이었다. 누군가 갖다놓은 커다란 인형처럼 그애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치과의사의 딸이었다. 얼마 후 그녀와 나는 호텔 앞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눈앞에서는 분수대가 하얗게 물을 뿜고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침마다 내가 버스정류장에서 자신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을. 그래서 자주 지각을 했다고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날 그녀와 호수가 있는 유원지에 갔다. 유원지는 시내에서 버스로 이십 분 걸리는 곳에 떨어져 있었다. 관광호텔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그녀와 나는 유원지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목마를 타고 오리처럼 생긴 배를 탔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아이들처럼. 그녀는 보랏빛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학교갈 때 신는 흰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신발은 금방 빨아 말렸는지 새로 산 것처럼 깨끗했다. 그녀는 별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면 피하지 않고 조용히 웃어보였다. 나는 이빨 뺀 자리의 통증을 느끼며 그때마다 그녀를 따라 소리 없이 웃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너무나도 조용한 나라. 그녀는 유난히 반짝이는 머리칼과 깊은 눈매를 하고 있었다. 이성에 대해서 가장 예민한 나이인 그때, 나는 그녀의 가슴과 양말을 신은 발과 목덜미와 손과 허리를 줄곧 훔쳐보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날 그녀와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광각렌즈로 찍은 사진처럼 유원지의 풍경이 둥그렇게 휘어져 있었다. 그 안에 호수가 있었고, 그녀와 나는 흔들거리는 오리배 안에 앉아 있었다.
(중략)
가까스로 막차에 올라타 도로 시내로 나왔을 때는 밤 여덟시가 넘어 있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고 그녀는 태연하게 오늘 밤에 호수 속에서 만나, 라고 말했다.
그날 밤 꿈에 나는 유진과 푸른 물속을 헤엄쳐다니고 있었다. 나도 금붕어로 변해 있었다. 물풀 사이를 헤치고 그녀와 나는 벌거벗은 채로 호수 밑바닥을 밤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별똥별이 물 속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네시였다. 천장에 금붕어 두마리가 놀고 있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상한 여자애를 만났다. 만난 지 하루 만에 유원지까지 다녀왔다. 그것도 밤늦게. 그애는 어디서 온 것일까. 수수께끼 같은 애다."
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中-
문장 ㅈㄴ 깔끔하고 정갈하고 이미지 드러내는 방식 세련됐고... 다만 왕자병이 의심되는 인물에 작위적이고 낯간지러운 대사, 센치한 아저씨 감성이 단점. 그리고 여성에 대한 신비주의적 시선이 남자가 봐도 좀 거슬리는 지점들이 있음.
한때 한국의 하루키 다운그레이드 버전으로 불렸던.
어렸을 때 읽은 뒤 한참동안 책장에 방치해뒀다가, 몇년 전에 사랑니뽑고 갑자기 저 소설 생각나서 다시 읽었던 기억이 있음. 매복사랑니라 대학병원에서 진료봤는데 뒤질 뻔 했다.
단중편은 어디내놔도 안꿀리지
<상춘곡> <빛의 걸음걸이>는 지금봐도 수작. 나이들고 필력감퇴한 뒤로 쓴 <제비를 기르다>도 나름 괜찮던데 너무 예스러워서 안먹힐 듯.
은어낚시통신 읽는중인데 매끈하고 세련되면서 동시에 고리타분하고 퀘퀘한 인상도 들더라. 여러모로. 그래도 기본적으로 문장력은 출중한듯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