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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 아도르노는 놀랍도록 (후기) 루카치와 그 태도가 비슷하다. 저자 명을 가리면 어디 80년대에 출판된 동유럽 마르크스주의 서적이라고 해도 믿을만 할 정도다.

- 부연 설명을 하자면, 잘 알다시피 아도르노는 루카치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강의록들에서 아도르노가 루카치에 대해 하는 언급들을 생각해보면, 비합리주의 비판이라는 후기 루카치의 작업이 아도르노의 눈에는 너무 교조적으로 비쳐보인 듯 하다. 후기 루카치의 작업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파시즘의 사상적 뿌리는 쇼펜하우어-니체-하이데거&슈펭글러&셸러&기타 등등으로 이어지는, 루카치 본인의 평에 따르면 비합리주의 사조이고, 파시즘이 "제3의 길"을 제시하듯이 이들은 관념론-유물론 대립에서 "제3의 길"로 "존재", "현상" 등을 내세우는데, 루카치에 따르면 이것들은 관념적인 요소를 신비주의적으로 포장한 것으로, 자신들의 주관적 관념론을 수사구로 은폐하려고 하거나, 소박실재론과의 모순적인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루카치는 나아가 하이데거 철학과 실증주의가 동전의 양면임을 주장한다. 루카치는 레닌의 마흐주의 비판(모든 것이 감각이라는 주관적 상의 결합이라면, 그것은 세계가 나의 감각임을 의미하는 바 유아론이다)을 수용하여 여러 곳에서 주-객 상관성이 항상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가져오는 주관주의(“주관에 매개되지 않은 객관은 없기에, 모든 것은 주관에 따라 가변적이다”)의 혐의를 하이데거에게 제기한다. 예를 들어, 루카치는 「Heidegger Redivivus」라는 소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길지만 인용해보겠다.

“이제 현존재는 『존재와 시간』의 정확히 가장 모호한 범주이다. 한편으로, 현존재는 객관성의 외피를 쓰고 나타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현존재의 의미란 지극히 주관적인 인간 실존에 불과하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순수한 인간학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이데거 왈: “진리는 오로지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뉴턴의 법칙들, 모순율, 진리 일반은 현존재가 존재하는 동안에만 참되다. 현존재가 있지 않았던 전과 있지 않을 후에는, 진리는 없었고, 없게 될 것인데, 왜나하면 그러고는 열어 밝혀져 있음과 발견으로서의 진리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흐주의의[실증주의의] 인식론과 정확히 합치한다. 하이데거의 새로운 저작에서[『휴머니즘 서한』에서], 하이데거는 비슷한 문장을 자신의 더 오래된 저작에서 인용한다: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자가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이데거는 이것을 덧붙인다: “이 문장은 존재자가 인간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확신일 뿐이고, 비슷한 것들이 마흐주의자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하이데거가 초재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칸트의 경우일지라도, 물자체의 초재성은 칸트 인식론의 주관적 관념론을 상쇄하지 않는다.”

즉 하이데거 현상학에서 실재는 현존재에게 종속되어버린다는 점에서 실증주의와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도르노는 놀랍도록 루카치와 비슷한 태도를 여기에서 견지한다.

- 아도르노에 따르면 현상학과 실증주의는 소여된 것에 대한 반성이 결여된 채 그것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소여된 것을 실체화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주관주의인데, 무엇이 진리인지가 의식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진리는 의식으로도 존재로도 환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실존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지배하는 생각은, 진리의 척도가 어떤 성격의 것이든 그 객관성이 아니라 사유하는 자의 양태존재나 반응양태라는 생각이다. 이성에서 그 이성적 계기를 제거함으로서 실증주의자들의 주관적 이성이 고상한 것으로 취급된다."(207)

"그러나 주체와 객체가 상호침투하여 이루는 주체와 객체의 짜임관계인 진리는 결코 주관성에 환원시킬 수도 없고, 역으로 존재에 환원시킬 수도 없다."

정통 맑스주의자들과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추종자들은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아도르노의 이 정식은 상대적 진리라는 레닌의 개념과 놀랄 정도로 흡사하다.

- 아도르노는 사유의 금지는 주어진 것에 대한 사유의 절대화, 그러니까 사유의 이데올로기화를 불러올 뿐이라고 경고한다.

"사유를 금지하게 되면 사유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을 인준하고 만다."(152)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논리실증주의와 비트겐슈타인이 (전기든 후기든) 유행시킨, 이른바 "사이비 문제" 담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사유의 명시적인 금지는 우리가 사유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의 사유는 금지시키지 못하고 그에  반대되는 사유만을 금지할 뿐인데, 이는 기존의 사유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모든 독단론의 폐기야말로 가장 독단론적인 법이다.

"철학은 칸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추방이나 말살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이성의 비판을 요구한다."(152)

일례로,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제3의 범주로 주-객 도식을, 마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사이비 문제" 선고를 내리듯이, 극복하려고 하는 반면, 아도르노는 주-객 도식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 내가 읽고 정말로 어이가 없었던 책 중에 존 카푸토의 『포스트모던 해석학』이란 책이 있는데, 나는 카푸토에 대해 아도르노의 이 말을 말해주고 싶다.

"...어떤 철학이 형이상학임을 부인한다고 해서 실제로도 그렇다고 판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철학이 주관주의임을 부인한다고 해서 실제로도 그렇다고 판정되는 것은 아니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행해진, 지구과학을 통해 마흐의 유아론을 반박하겠다는 레닌의 순진한 시도는 오로지 마흐가 자연과학의 성과의 객관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논증에 도입함으로서만 내재비판으로서 성공적이었다. 그러니까, 마흐의 논변이 하도 역대급으로 허접해서 이 논변이 먹힐 수 있었지 상대가 조금이라도 철저했다면 안 먹혔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웃긴 촌극이 하나 있다. 카푸토는 이 책에서 해석학이 주관주의가 아님을 여러 선언들로 보증하려고 하지만, 그 선언이 해석학의 주 체계와 조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마흐의 삽질을 100년 뒤에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레닌의 이 괴이한 비판을 반복하고 있는 레비 브라이언트도 있다.)

-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레닌이나 루카치의 시도보다는 아도르노의 시도가 더욱 모범적이고 철저하다.『부정변증법』에서 제1부의 전체는 하이데거와 후설 현상학 비판에 할애되고 있는데, 이것은 구조 상 "객체의 우위"라는 그의 입장을 정당화시켜줄 내재적 비판에 해당한다. 레닌이 "저급한 유물론"이라 한 것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분하지 못하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물론을 공리로 도입해놓고는 관념론을 반박했다고 자위하지만, 그것이 반박이 아니라 선언임은 삼척동자도 안다.

"존재철학[하이데거 철학] 자체의 구조 내에서 존재철학 자체와 대결하지 않고, 또 헤겔의 요구에 따라 존재철학 자체의 힘으로 그것에 맞서지 않고, 일반적으로 존재철학 외부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존재철학에 대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165)

아도르노의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별개이겠지만, 적어도 방향성은 훨씬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 아도르노는 하이데거가 범주직관이라는 후설의 개념을 가지고 종차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신비주의라고 비판한다.

"만일 하이데거처럼 존재를 그 외연논리적 개념과 구분하려 한다면, 존재자와 추상의 범주들을 제거하고 나면 칸트의 초월적 물자체 개념보다 주술적 파토스 말고는 아무것도 나을 것이 없는 어떤 미지의 것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하이데거가 포기하고 싶지 않을 사유라는 말도, 사유되어야 할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내용 없게 된다. 즉 개념 없는 사유는 어떠한 사유도 아닌 것이다."(167)

- 후설의 범주직관이라는 방법은 실재와의 무매개적 접촉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이고 실증주의적이다. 모든 소여는 매개되어 있기에 모든 소여는 반성되어야 한다.

- 아도르노는 하이데거가 계사의 의미를 오해한다고 비판한다. 주어와 술어 사이의 "이다"(is=be)는 어디까지나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표현하는, 그러니까 주어와 술어에 의존적이고 자립적이지 않은 것인데, 이를 자립적인 것으로 실체화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존재는 존재자에 후행하는 것임에도 하이데거가 존재를 존재자에 앞서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고 비판한다. 이는 존재(be=is)가 존재자에 의해 나타난다는, 아도르노의 유물론으로 연결되는 듯 하다.

- 한 마디로 아도르노는 하이데거가 이미 매개된 것을 무매개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주장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실재와의 무매개적 접촉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이고 독단론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도르노도 실재와의 접촉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이 반성 없이 직접적으로 말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아도르노의 철학은 부정신학적이다.

- 여러모로 아도르노와 포스트담론들의 차이를 확인하기에 좋은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