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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古調) 1」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한 동아줄이나 있다면

  샘 속이라도 몇만 리라도 갈 길이나 있다면

  샛바람이건 무슨 바람이건 될 수라도 있다면

  매달려서라도 자맥질해서라도 가기야 가마.

  문틈으로건 벽틈으로건 가기야 가마.

  하지만 너, 내 눈앞에 매운재나 되어 있다면

  내 어찌 올꼬.

  흥건한 물이나 되어 있다면

  내 어찌 올꼬.



- 『신라초』(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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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인구에 회자되는 「꽃밭의 독백」의 마지막 구절은, 꽃 너머에 숨겨진 비밀을 깨달을 수 있게 그 길을 펼쳐 줄 문을 열어 달라는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집에 실린 「가을에」에는 역시 인구에 회자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라고? 문이 열리는 틈을 타서? 어쩌면 「가을에」의 화자는 「꽃밭의 독백」에서 사소가 문을 열어달라고 노래했던 바로 그 꽃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꽃이 열어 주는 문을 통해 길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화자 자신이 현실적으로 맞닿을 수 없는 어떤 것과 초월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샤머니즘을 연상케 하는 옛 사람들의 내세관이기도 하다. 위의 시 「고조 1」과 국화꽃이 죽은 자리에는 국화꽃 귀신이 생겨나 산다는 「고조 2」가 시집 속에서 신라 시편의 바로 다음 상석을 차지한 것은 그 점에서 자연스럽다. 이로 볼 때 '고조(古調)'라는 제목은 구식의 어조보다는 구식의 가치관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생각된다.


「고조 1」은 「꽃밭의 독백」의 후일담 비슷한 작품이다. 다소 신파적인 냄새가 있어 좋은 시라고는 하기 어려워 보인다. 어투라든지 '매운재'나 '흥건한 물'이라는 단어 때문에 세상을 떠난 상대를 향한 노래처럼 들리기 쉽지만 그렇게 읽을 때 이 시는 정말로 신파적이게 된다. 그렇게 읽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사소의 화두가 지닌 측면을 그러한 소재를 통해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재미있게 읽힐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이 찾고 보니 사실은 별것 아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는 어찌해야 할까? 암만 우겨 봐도 '매운재'가 '너'일 수는 없다. 그는 대상에 대한 애착과 대상의 실제 의미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그것이 '매운재'에 불과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두고 훌훌 돌아오기가 너무나 힘이 들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매운재'가 있는 공간에 스스로 갇혀 자신이 떠나 왔던 실제의 현실을 버리는 꼴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런 꼴은 신라 시편이 지닌 이른바 만들어진 전통의 함정과도 유사한 것이며 서정주 자신이 신라에 대해 갖는 감정과도 무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