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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읽고
*주관적인 해석과 책에 대한 정리를 위한 감상기록입니다.
다른 의견이나 제 감상에 대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본 것은
기술복제로 인해 '인간의 지각 능력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복제 기술은 계속 발달하고 있으니
인간은 점점 더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말이 됩니다.
이 것에 관해 세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변하는 것인가?
어떻게 변한다는 것인가?
변화된다면 그것으로 어떻게 살아가야될까?
1. 왜 변하는 것인가?
예전에는 예술작품이 특정 소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의미도 고유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이 고대 시절이고 신성한 조각상이 있다고 합시다.
이 조각상의 의미는 신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너무 신성하기 때문에
제사장이나 특수한 지배집단만이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합시다.
이 예술작품은 복제할 수도 누구나 쉽게 감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 본래의 가치가 유지되죠.
이제 이 조각상을 현대로 가져와 3d 프린터로 똑같이 복제하고
각 나라 여기저기에 아무나 볼 수 있도록 전시한다고 생각하면
그 조각상의 의미는 어떻게 될까요?
길거리에 전시된 이 조각상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 조각상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제가 조각상을 예로 들었지만 지금 현대사회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복제되고 있습니다.
복제는 원본의 아우라를 사라지게 합니다.
어떤 대상의 아우라는 시간과 공간이 특정되어있습니다.
산 정상에서 본 멋진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언제 어디서든
본다고 해서 그 정상에서 본 느낌 그 아우라까지 복제할 순 없습니다.
인류는 계속 발전하고 있고
그에 따라서 복제 기술도 발달합니다.
즉 수 많은 원본들의 아우라가 사라지고 있죠.
그것이 안타까운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인류 문명 발달에 필연적인 어떤 현상들은
결국 문명 발달의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인간의 지각 능력이 변하는 이유
첫 번째는 이렇게 대상들에 대한
아우라가 사라지며
의미가 다양해졌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신성한 조각상은 의미가 단순했습니다.
'신을 위한다'는 의미 하나밖에 없었죠.
현대로 가져와 3D 프린터로 똑같이 복제 된 조각상이
여기저기 전시됐을 때 그 조각상의 의미는
조각상 자체에서 개개인으로 옮겨갑니다.
무신론자가 바라보는 관점, 조각 디자이너가 바라보는 관점,
미술관에 데이트하러 온 커플이 본 관점 등
그러니 의미가 다양해지죠.
그 이유는 대상을 볼 수 있는 공간과 시간대가 다양해지는 만큼
다양한 사람 즉 다양한 관점에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상에만
의미가 컸고, 의미와 대상을 만드는 사람도 소수였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의미와 대상을 소수가 만들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만이 의미라고 생각하니까요.
인류가 발전할 수록 다양한 사람들이 창작물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관점을 다양하게 노출시키고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할 수 있는
기술들 또한 넘쳐납니다.
책에서는 사진과 영화를 예로 들었지만
저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도 강력한 복제 기술 혁명의 하나로 생각됩니다.
당연히 발터 벤야민도 지금 시대에 살았다면 이런 기술들에 주목했을 것입니다.
지각이 변화하는 이유 첫 번째에는
대상의 의미가 다양해졌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 다양해진 의미를 우리가
너무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작품의 후기는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지만
기술 자체에서도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책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 재구성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영화는 현실의 재현입니다. 간접적으로 재현된 현실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평소에 보지 못한 공간과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타인의 일상과 사건들을 접합니다.
우주 속에 공간을 볼 수도 있고, 초현실적인 풍경도 볼 수 있습니다.
에니메이션을 본다면 벌레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진짜는 아니지만)
이렇게 세상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지각 능력이 변화합니다.
이전에 없던 현대인들의 복잡한 신경증세도 이와 관련이 있겠죠.
박쥐는 세상을 초음파로 본다고 합니다.
같은 지구에 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죠.
인류 또한 겉모습은 비슷할지라도 100년전과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인류는 현재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여기서 자연스럽게 2번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2,. 어떻게 변화한다는 것인가?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이 지각은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추출해낼 정도이다.> - 16P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나 커진 이유는
앞서 얘기했듯이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부자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알 수 있고,
슈퍼스타의 일상과 생각, 또는 여러 영상들과 커뮤니티 댓글들을 통해
저마다의 생각을 쿠키 먹듯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에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지만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슈퍼스타의 일상과 나와 생각이 전혀 다른 댓글을
보고 어떻게 동질적인 감각이 커진다는 것일까요?
동질적인 감각은 그것에 공감하거나 동의한다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공통으로 느끼는 감각이 커진다는 것이죠.
고대에는 신분마다 보는 세계가 달랐습니다.
현재는 개개인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다양한 관점과 세상을 '같이' 봅니다.
기술발달로 인해 이러한 일이 특권이 아니게 됐죠.
같이 보는 여러 관점에서 나와 같은 생각이 있고
다른 생각 또는 나와 비슷한 생각이 있습니다.
관점을 음식이라고 칩시다.
그럼 지금 세상은 뷔페 식당입니다.
예전에는 메뉴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여러 음식들을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먹고 뱉어버리거나 욕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PC주의, 남녀갈등, 세대갈등, 여러 갈등은
이런 남의 관점을 너무 잘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합니다.
일회적인 복제 대상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찾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대상에서도 자신만의 관점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고유하고 신성한(누군가가 그렇다고하는) 의미'에서 개개인들의
의미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휙휙 넘기는 쇼츠나 릴스에서 잠시 머무르는 이유는
자신과 관련된 혹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죠.
이것에 관해 강신주 철학자의 장자 강의 중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텍스트주의와 콘텍스트주의 차이입니다.
텍스트주의는 문맥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콘텍스트주의는 문맥이 여러개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해'라는 뜻은 상황과 사람에 다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단어를 그 자체가 아닌 다양한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합니다.
어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 문맥으로 끌어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비우고 작품 자체로 뛰어들어가야된다고 합니다.
-
기술복제로 인해 대상의 의미는 다양해졌고 우리는
다양해진 관점과 생각을 언제 어디서나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관점으로 끌어오고 세상을 해석하면 모든게 다시 단순해집니다.
갈등도 심화되겠죠. 다양한 세계관이 적이 되는 것입니다.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반응합니다.
느낀다고 해서 동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지각은 다양한 관점을 느낄 수 있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3. 변화된다면 그것으로 어떻게 살아가야될까?
복제 기술의 발달은 대상에 여러 의미를 가지게 하고
여러 의미 가지고 사는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된 기술은 '개개인마다의 관점이 다르다' 즉
세상에 문맥이 여러개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관점만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타인의 관점을 동의하진 않더라도 수용하고 어울리며 살 것입니다.
뭐가 옳고를 떠나
자신의 관점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거시대보다 현재 더 불행할 것입니다.
과거 시대에는 다른 다양한 관점이 (지금보다) 생기지도 않았고, 볼수도 없었고
나의 관점을 공격할 대상이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현재에 자신의 관점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즉시 수 많은 다양한 관점을 적으로 돌리게 되고
그 수 많은 적들을 사방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아군을 찾아
자신과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쫒아다닙니다.
극단주의자들이 상대적으로 요즘 더 많이 생기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불행하길 자처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나의 관점만 옳다고 생각하는 과정에는 기질과 자라온 환경이 고루 섞여있을 것입니다.
타인의 관점을 동의하진 않더라도 어울려 사는 사람은
강신주가 말한 콘택스트주의자 즉 여러 문맥을 받아들일 줄 알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책을 많이 읽거나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지혜로운 이유는
여러 문맥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관점의 수용은 세 가지 이유에서 필요합니다.
1. 행복
2. 협력
3. 발전
3가지를 추구하는 것이 의무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요즘 시대는 저것을
두루 추구하지 않으면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 지옥에 사는 기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이유인 행복은 위에서 나의 관점만 가지면 현재시대에 더 불행한 이유로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는 협력입니다.
현대 시대의 문제는 복잡합니다.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A.I 시대는 곧 전문가의 종말이라고도 합니다.
A.I가 없던 전문가의 시대에서
전문 지식은 개인의 것이 될 수 있고 개인이 혼자 고차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전문 지식이 없으면 낮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엘리트의식은 나혼자 잘났기 때문에 잘 살 수 있고 협력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복제 기술은 A.I시대를 맞이했고 이제 '전문성'까지 복제하고 있습니다.
전문성의 아우라가 사라지고 있죠. (아니면 벌써 없을지도요)
단순히 전문지식으로 남을 돕는 것 이상으로 세상에 기여하지 않으면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자리가 대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전문지식)보다는 간호사(인간보살핌)가 대체되기 어렵다고 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혔는데, 버전 업되면서 이전 기술은 필요없어지는 경우를
저는 직접 경험했습니다. 버전 업 되는 그 기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습니다.
요즘엔 '퀵 러너'라는 말도 많이 쓰입니다.
그만큼 빨리 배워야 되야되는데
시간은 한정돼있습니다.
같이 뭔가를 도모하는 협력이 아니라(그것도 좋지만)
내가 생존을 위해 여러가지 것들을 배워야하는 일이
많이 생기고 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 협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타인과의 교류 즉 협력을 잘하려면 다양한 관점을 수용할 줄 알아야합니다.
빠르게 배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점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합니다.
이전 버전의 기술들을 어렵게 익혔다고 해서 집착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으면
효율적이지 못하게 일을 처리할 것이고 그것은 고스란히 삶에 반영됩니다.
빅데이터 전문가인 송길영 작가가 '핵개인의 시대'라고 얘기했지만
그것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지
혼자 살라는 얘기로 쓰여진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골방에서 혼자 주식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봐야됩니다.
그 정보를 잘 받아들이려면 관점 수용 능력이 좋아야되구요.
예전에도 개인 주식 트레이더는 그랬겠지만
A.I시대는 이런 느낌의 일들이 사회 전반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죠.
3. 발전
[ 예술의 전 영역에서 점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고 또 지각구조의 변화를 가리키는
징후라고 할 수 있는, 정신분산 속의 수용은 영화에서 그 고유한 연습 수단을 갖고 있다.]
몰입의 저자 황농문 교수가
집중된 상태는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이고
산만한 상태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집중)에서 높은 상태(산만)로 이동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엔트로피를 낮추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류의 신기술이던 개인의 운동이던 계속해서
부분적으로 엔트로피를 낮추면서
개인의 차원이던 인류의 차원이던 발전을 해나가는 것이죠.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라는 일원론적 우주론을 생각해보면 그리 구분지을 일도 아닙니다.)
엔트로피가 커지는 것은 더 큰 퀘스트를 주는 것이고
그 퀘스트를 깨가는게 발전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있는
방 한칸에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하면
시간이 지날 수록 생필품은 줄어들고 방은 어질러질 것입니다.
새로운 생필품을 개발하거나 방을 정리하지 않으면
산만한 상태에서 일찍 죽어버릴 것입니다.
엔트로피 증가는 인류에게 발전을 요구하며
발전은 더 큰 퀘스트를 만듬과 동시에 생존과 번영을 가져오죠
벤야민이 말한 정신 분산 속의 수용은
인류가 이 복잡한 신경증을 앓고 있는 사회에서
삶에 필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 수단은
인류 발전 과정의 속성과 일치합니다.
세상이라는 큰 틀은 집중->산만으로 가고 있지만
그 안에는 작은 집중과 산만들이 반복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수 없이 펼쳐지죠.
(집줍 -> 산만 ->집중 ->산만)
개인의 차원에서 인간은 여러 관점들을 보며
의미가 다양해졌기 때문에 산만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다양한 세계관을 무작정 받아들일 수 없을땐 괴로울 수 밖에 없죠.
영화(다양한 관점과 세상 간접체험)가 그것을 견디게 하는 연습수단이라고 합니다.
발전의 측면에서 이러한 정신분산적 수용이
인류 발전에 당연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크게 뭉뚱그려서 보면
세상은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이동하면서
인류의 관점에서 발전이라 부르는 것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갈수록 산만해지는 시대(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에서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능력은 인류 발전에 필요한 능력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감정과 상황에 상관없이 세상은 발전을 향해 굴러갑니다.
발전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관점 수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발전을 하기 때문에 인류 즉 개인에게 다양한 관점 수용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발전이 세상의 발전이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너무 낭만적일뿐이죠.
결론 : 중요성이 사라지는 시대
이전 시대로 시계를 돌릴 수록 중요한 게 많았습니다. 요즘은 최후의 보루 같던 가족의 의미도 예전과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은 다른 것을 덜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족애가 너무 많으면 가족 이기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기술 복제로 인해 의미가 다양해진다는 것은 양날의 검 같습니다.
허무주의로 빠지거나 실은 여러 세상이었던 진짜 세상을 마주하는 것이죠.
태어날 때부터 주입되었던 국가나 어쩌면 종교,가족,선생님, 친구,동네 형,오빠,누나,언니, 내가 접한 컨텐츠들, 영화나 책이나 여러 커뮤니티의
사고관들이 섞여져서 나만의 렌즈를 만듭니다.
그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을 나의 관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살아온 시간과 형성된 자아가 결부되어있으니 소중하겠죠.
저는 기술의 발전이 이런 개개인의 렌즈에 금이 가게 만들도록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나의 관점이 아니라 세상이 주입했던 관점인 것이죠.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발전 기술은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의 아우라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에서 진짜로 눈을 돌려 다른 세상을 봅니다.
점잖던 전문가들도 헉헉대며 쫒아가는 급변하는 세상과
전문성이 복제되는 세상에서 그 누구의 조언도 한발짝 떨어져서 듣게 됩니다.
뭔가에 종속되고 그것만으로 세상을 보는게 개인이었다면 이제는 그렇게 사는 것이 생존에 위협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저자는 괴짜 과학자 아버지를 뒀는데
아버지는 딸에게 "넌 세상에서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그 말의 진정한 의미가 느껴졌습니다.
다음은 그 책의 저의 리뷰 일부분입니다.
[ 우생학처럼 과격하지는 않더라도 세계에는 다양한 질서가 존재한다.
그 질서는 결국 인간의 잣대이니 완전하지 않다.
"너는 세상에서 중요하지 않아."
괴짜 과학자인 저자의 아버지의 이 말은 딸의 삶을 공허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딸이 세상을 더 풍요롭게 보도록 경계를 허물고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라는 애정어린 말이었다.]
기술의 발전이 여러 중요성을 허물고 있는 것은 개인들에게 여러 관점과 여러 세계를 보여주고
여러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결국 개인의 몫이겠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명저..
되게 잘쓴글 같은데 넘 길어서 나중에 읽어보겠음 - dc App
강의 듣는 느낌이었네요 ㄷㄷ 글 너무 잘 봤습니다
칼럼니스트 꿈꾸나 잘썼다 ㄷㄷ
블로그 주소 좀 알려주세요 선생니;ㅁ
여러 플랫폼에서 열심히 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