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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감각적인 첫 문장은 글의 세계에 내리는 첫눈과 같아, 독자들의 심상 속에 설국의 눈처럼 쌓일 묘사들을 암시한다. 이윽고 <설국>의 문장들은 금세 하얗게 쌓여, 하늘하늘 내려앉던 첫눈을 잊게 만든다. 눈의 고장은 그야말로 새하얗고 깨끗한 눈으로 뒤덮인 눈의 나라였다. 설국의 풍경과 분위기, 인물들의 섬세하고 오묘한 말투와 행동에서 피어오르는 감상적 인상은, 야스나리가 눌러쓴 세련되고 감각적인 묘사와 이야기의 파편적 흐름에서 기인한다.

 

이 감각적인 소설 <설국>은 야스나리가 여행을 떠날 때마다 쓴 단편들을 모아, 연작 풍의 소설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생겨난 경험의 인상들처럼 <설국>의 이야기는 툭툭 끊어져 있다. 우리는 이 경험의 인상들을 기억이라고 부르며, 이것으로 상념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설국>은 기억으로 만들어진 상념의 세계이다. 야스나리 혹은 시마무라의 경험은 파편화되어 상념 속에 흩어져있었다.

 

새하얀 눈, 창문을 열면 어느새 차갑게 스치는 겨울의 바람, 다다미의 촉감, 고타츠의 온기, 김 서린 열차 창문에 손가락을 대고 문지를 때 나는 뽀드득 소리, 요코의 눈빛, 고마코의 몸동작, 그녀의 발그레한 뺨과 희고 곧은 목선. 고마코가 연주하는 샤미센 현의 울림은 마음보다는 상념과 공명한다. 그는 파편화된 기억들을 하나, 둘 이어 붙여 공감각적 시선을 만들어낸다. 그중에서도 색을 묘사하는 문장들의 세련미와 감각미는 눈의 하얀색 위에 그려져, 생명이 움츠러드는 계절인 겨울에도 엄정하게 존재하는 생() 그 자체를 독자들의 마음 속에 심어 넣는다.

 

어떻게 타인의 마음에 무언가를 심어 줄 수 있을까? 야스나리가 본 풍경, 그 주관적인 관찰의 결과는 기억과 똑같이 작동하는 이야기 구성과 맞물려 독자에게 새로운 기억을 심어 넣는다. 이 주관성 강한 새로운 기억이 독자로하여금, 상념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 이러한 이미지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상적 인상을 남긴다.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서로에게 이렇다 저렇다 하는 상념적인 풍경들만을 주고 받음으로써, 역시 서로의 마음 속에 감상적 인상만을 심어버린다. 이 감상성의 세계 속에서 반복되는 인물들의 작은 만남과 작은 헤어짐들 또한 독자들에게 그저 꿈틀대는 어떤 느낌을 줄 뿐이다. 그러나 <설국> 속 인물들도, 독자들도 그 형용할 수 없는 감상에 젖어 서로에게 끌린다. 논리도 감정도 아닌 상념의 공명은, 적막함이 감도는 작품 <설국>을 역동하는 작품으로 바꿔놓는다.

 

희고 깨끗한 피부 위에 흘러내리는 검고 무거운 머리칼, 어리숙한 눈매를 품어주는 짙고 긴 눈썹,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과 붉은 동백실. 고마코는 설국에서도 곧게 피어난, 깨끗한 꽃이다. 약혼자가 죽는 장소이자 생이 다하는 계절인 겨울의 나라에서 고마코는 생()이다. 때문에 죽음을 거부한다. 색이 없는 요코는 하얀 설국 속에 파묻혀 눈에 띄지 않는다. 선생님 아들의 죽음을 보살피는 요코는 고마코의 반대극이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요코 사이에서, 설국과 도쿄 사이에서, 생과 죽음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그저 상념적 이미지들만을 이야기하며 자기 마음 속에 심어진 감상적 인상만을 키워나간다. 밤하늘에 펼쳐진 그 은하수는 땅 위에 쌓인 새하얀 상념과 감상들을 초월하는 체험의 이미지일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시마무라는, 그리고 고마코는 그동안 회피해오던 과정 상의 생과 끝의 죽음을 모두 직면한다.

 

<설국>은 오직 상념과 공명하는 풍경을 통해 어떠한 인상만을 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억의 작동 방식과도 같다면 <설국>은 새로운 기억을 피어오르게 하는 경험과도 같다. 그리고 밤하늘에 펼쳐진 그 은하수가 <설국>을 감상적 기억에서 새로운 체험으로 변모시키는 결정적 이미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