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모임에 쓸 용도로 적었는데, 혹시나 라캉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한번 올려봅니다.


라캉 개념을 대충이라도 알고 본다면 더 잘 이해가 될 듯합니다. 숀 호머 <라캉 읽기>, 조엘 도르 <라깡 세미나/에크리 독해>, 그 외 논문, 블로그 글(<도서관을 통째로>) 등을 참고하여 작성했음. 근데 한글에서 작성했는데 여기에 옮기니까 주석들이 하나도 안 달리네. ㄲㅂ






<목차>


거울단계(상상계)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1. 동일화적 국면(자신의 육체 이미지에 대한 점진적 정복)


2.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세 계기


1) 첫 번째 계기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 싶다.”


2) 두 번째 계기 “나는 어머니의 팔루스가 될 수 없다. 어머니에게서 팔루스를 박탈(거세)한 자는 아버지다.


3) 세 번째 계기 “어머니와의 주이상스는 금지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나를 동일시한다.”






1. 동일화적 국면(자신의 육체 이미지에 대한 점진적 정복)



“거울단계 이전에 아이는 자신의 육체를 통일된 전체가 아니라 분산된[파편화된] 어떤 것으로 경험한다.” 아이는 이러한 분산된 이미지에서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총체적인 육체적 이미지를 추구한다. 여기서 ‘상상’, 즉 ‘동일화’의 힘이 나타난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타자 이미지를 나의 이미지라고 상상(동일화)한다. 이 동일화 경험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에서 아이는 자신과 타자를 혼동한다. 때린 아이는 자기가 맞았다고 한다. 다른 아이가 넘어진 것을 보던 아이는 넘어진 아이와 함께 운다. 이러한 모습들은 상상적 질서에 대한 아이의 종속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두 번째 시기에서 아이는 현실(réalité)과 이미지(image)를 구분한다. 즉,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세 번째 시기에서 아이는 앞의 두 순간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한다. 아이는 거울에 비친 것은 이미지일 뿐이지만(두 번째 시기), 또한 동시에 그 이미지는 나의 이미지라고 확신한다(첫 번째 시기). “이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재-인식(re-connaissance)함으로써 아이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표상인 통일된 총체성 속에서 조각난 자신의 육체를 복구한다. 그러므로 육체 이미지는 주체의 최초의 동일화를 실현하는 주체의 동일성[정체성, identité]을 구조짓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제 이 구조 위에서 전 생애 동안 정체성을 정복, 획득하고자 한다. “거울 국면이 ‘나(Je)’의 ‘사전 형성’[선취, préformation]을 의미한다면 그것[나의 사전 형성]은 그것의 구성적 원리로서 상상계에서의 소외라는 운명을 전제한다. (……) 상상적 소외로부터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기를 멈추지 않는 만성적인 ‘오인(méconnaissance)’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2.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세 계기


1) 첫 번째 계기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 싶다.”


동일화의 과정을 거친 주체는 드디어 상상계적 주체(자아)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와 어머니는 미분화되어 있다. 호머가 지적하듯이 “유아의 생후 초기 경험들은 어머니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심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것은 어머니가 영양과 보살핌과 양육이라는 아이의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이는 어머니/타자(m)other의 욕망에 관한 수수께끼에 직면한다. 타자(Other)의 욕망 안에서 나는 무엇인가? 아이가 구상해 내는 대답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가 어머니의 욕망을 마주하는지, 그리고 그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놓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왜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에 관한 수수께끼에 직면’하는가? 어머니가 24시간 내내 아이만 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어머니는 아이의 모든 ‘요구(demand)’를 완전하게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100을 요구하는데 어머니는 80만큼 채워준다. 이 채워지지 못한 –20이 ‘욕망’을 만든다. 즉, “요구에서 욕구를 공제한 잔여가 욕망이다.” 아이는 이제 어머니를 욕망한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달리 말하자면 어머니 역시 나(아기)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어머니와 아기의 2자 관계는 깨진다. 아이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의 욕망(대상)’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이-어머니의 욕망-어머니>라는 3자적 관계가 형성된다. 물론 아이는 상상계에 놓인 주체답게 그 어머니의 욕망(대상)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즉, 어머니의 욕망(대상)과 자기자신이 같다고 상상(동일화)한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짚고 가야 할 점은 네 가지다. ① 아이는 어머니가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즉, 어머니 안에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그것을 계속 욕망한다고 생각한다. 라캉은 그 ‘무언가’를 ‘팔루스(남근)’라고 부른다. 그래서 팔루스는 단순히 ‘어머니의 욕망(대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팔루스는 동시에 그러한 ‘어머니의 욕망(대상)이 존재하지 않음(결여)’도 함께 의미한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단계에서의 팔루스는 ‘상상적 팔루스’라고 부르고, 후에 나올 ‘상징적 팔루스’와 구별되지만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사실은 하나라고 봐도 된다). ② ‘상상적 팔루스’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팔루스 자체도 이미 아이의 ‘상상’이다. 팔루스는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지만, 아이는 이 팔루스를 되찾을 수 있는 실제 대상과 연계시킨다. 즉, 상상적이다. 또한 아이는 팔루스를 되찾기만 하면 어머니의 모든 결여가 해소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왜 이런 상상을 하는가? 어머니의 욕망 구조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팔루스만 있으면 어머니가 완전하게 만족할 수 있다. 마치 부자만 되면, 서울대만 가면, 성형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같다. ③ ‘팔루스’는 ‘기표’다. 왜냐하면 아이는 단 한번도 어머니의 팔루스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알고 있는 건 단지 ‘어머니에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그 ‘결여된 무언가’에 대해 ‘상상적 팔루스’라는 이름(기표)을 붙였을 뿐이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였을 뿐이니 ‘기의’가 될 수 없고 ‘기표’가 될 뿐이다. 팔루스는 일종의 ‘공집합’이다. 즉, ‘없음’을 나타내는 기표다. ④ 여기서 아이는 전적으로 노예 상태다. 그는 스스로 욕망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어머니의 욕망(대상)이 되고자 하는 존재다.


아이가 행하는 어머니의 욕망(대상)과의 동일시는 실패한다. 우선 그러한 동일시 자체가 이미 상상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적으로도 어머니는 다른 무언가(직장, 친구 관계, 가사 노동 등)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대상)이 되기 위해 갖은 시도를 한다. 울어도 보고, 웃어도 보고, 꼬집어도 보고, 붙잡아도 본다. 말하자면 아이는 ‘팔루스’의 기의(의미)를 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기표를 제시해보는 셈이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a도 제시해 보고, b도 제시해보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다른 무언가를 욕망한다. a, b, c……. 아이는 기표를 무한히 제시하지만, 그 의미는 끝없이 지연된다(욕망의 환유적 속성).


이러한 끝없는 의미의 지연 속에서 아이는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된다. 그래서 그는 또다른 상상을 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의 지연을 멈출 수 있는 무언가, 어머니의 욕망(대상)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고정적인 대상을 상상해 낸다. 그것이 ‘상징적 팔루스’다. 이 상징적 팔루스는 “의미작용의 연쇄를 멈추게(anchors)하는 유일무이한 불가분의 기표”이다. 상상적 팔루스의 등장과 함께 3자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이제 상상적 팔루스의 자리를 상징적 팔루스가 대체한다. ““상상적 차원에서 기관에 가해지는 음수적(陰數的) 표식(욕망되는 이미지에 남근적 이미지가 결여된 것)은 욕망의 기표인 남근적 상징으로 양수적(陽數的) 존재를 갖게 된다”(Mitchell 1985: 117). 상상적 남근의 결여(-φ)는 대타자의 욕망을 나타내는 남근 기표(Φ)의 출현을 가져온다.” 의미가 지연되던 상상적 팔루스는, 확실하게 의미를 확정짓는(그러한 것으로 상상되는) 상징적 팔루스로 대체된다.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기표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로 치환된다(욕망의 은유적 속성). 그래서 우리는 이 과정을 ‘아버지의 은유’라고 말한다.


“이러한 초기의 치환행위를 통하여 의미작용의 과정이 시작되고 아이는 결여의 주체로서 상징계에 진입한다. 또한 이 때문에 라캉은 상징화 과정 자체를 ‘팔루스적’이라고 묘사한다. 팔루스는 아버지의 이름을 토앟여 무의식을 조직·편성(organizing)하는 기능을 하는 중심적 기표로서 설정된다.” 물론 이러한 치환은 첫 번째 계기에선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세 번째 계기에 가야만 완수된다. 여기에서 아이는 아직 어머니의 욕망(대상)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할 뿐이다.



2) 두 번째 계기 “나는 어머니의 팔루스가 될 수 없다. 어머니에게서 팔루스를 박탈(거세)한 자는 아버지다.”


말이 두 번째 계기이지 사실상 첫 번째 계기와 함께 일어난다고 봐도 좋다. 상상적 팔루스는 사실상 상징계를 이미 지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이는 어머니와 자신의 융합관계가 지속되지 못할 때 팔루스를 상상했고, 이 팔루스는 아이와 어머니의 어긋남을 중재해주는 심급이기 때문이다(“어머니는 팔루스를 욕망하므로 내(아이)가 팔루스가 되면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어머니/아이의 관계에 중재적 심급(아버지)이 [현실적으로] 부재하다고 가정한다 할지라도, 이[어머니/아이] 관계에서 발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팔루스적 동일화는 [아버지라는 중재적 심급이 상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사실상 전제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상상적 팔루스와 상징적 팔루스는 분명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실상 동일한 대상의 두 가지 양상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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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결여에 대한 짧은 설명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두 번째 계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대상 결여’의 세 가지 형태인 ‘거절’, ‘박탈’, ‘거세’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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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적 팔루스를 갖지 못함이 어째서 ‘상상적 결여’가 아닌 ‘상징적 결여’로서 나타나는지 의아할 수 있다. 이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상상적 팔루스의 결여(-φ)를 상징적 팔루스(Φ)의 등장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애덤즈(Parveen Adams)가 설명하듯이 “남아가 엄마(대타자)의 결여, 즉 거세를 목격하면 자신의 거세의 가능성, 즉 음경의 ‘부재’의 가능성을 인식한다. 이 부재의 가능성 자체가 바로 그것을 (대타자의 결여의) 기표로서 ‘존재’하게 만든다. 기표의 존재는 실제 그것이 지시하는 것의 부재로 인해 가능해진다”(Adams 1990: 243)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상상적 팔루스의 결여는 ‘-φ’라고 표현하고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욕망은 팔루스의 존재를 포기할 수 없다. 조엘 도르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에 따르면 아이는 어머니에겐 팔루스가 없고, 자신에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팔루스의 존재/부재를 실제의 육체와 연결하여 이해한다. 즉, 자신에겐 남성의 생식기가 있고, 어머니에겐 없는 것을 발견하고 나와 어머니 사이엔 차이(성차)가 있음을 인지한다. 그런데 이러한 ‘결여’에 기반한 성차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은 다른 육체를 지니고 있을 뿐이지만, 아이는 여성의 육체를 보며 남근을 ‘결여’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아이는 이러한 [성]차이가 결여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성차이라는] 실재에 심리적으로 접근한다. 달리 말하면 아이에게 성차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은 그 아이가 무언가 결여된 것이 있다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아이가 틀림없이 있어야 한다고 상상하는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를 고집할 때 아이가 품게 되는 환상을 통해 이 상상적 대상은 계속적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상상적 팔루스의 결여는 상징적 팔루스라는 기표의 출현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아이는 어머니가 다른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에게 상상적 팔루스가 ‘결여’되어 있다고, 즉 어머니가 거세되었다고 이해한다. 아이는 여기서 자신이 그 팔루스라고 생각하면서 ‘존재의 변증법(나는 팔루스인가, 아닌가)’ 속으로 빠져들어 가지만, 동시에 어머니가 상상적 팔루스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걸 보면서 ‘소유의 변증법(나는 팔루스를 갖고 있는가, 아닌가)’을 어렴풋이 짐작한다(‘어머니는 팔루스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구나’). 그래서 아버지는 ‘팔루스라는 존재자’가 아닌 ‘팔루스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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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아버지와 상상적 경쟁을 하고 어머니를 더욱더 욕망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심에서 촉발된 욕망은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법에 직면하게 만든다. 나의 요구가 강해질수록 어머니는 나의 요구를 점점 더 제한적으로 들어줄 수밖에 없다. 즉, 30분만 같이 놀자는 요구보다 세 시간 동안 같이 놀자는 요구가 더 들어주기 힘들다. 어머니는 아이의 요구(“이거 사줘”, “나랑 놀아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고민하거나 제한을 건다(“사탕은 안 돼”, “엄마, 이제 일하러 가야 해”). “이때 아이는 [욕망의] 가장 본질적 차원, 즉 “각자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의 법칙에 복종시키는” 것으로 욕망을 구조 짓는 가장 본질적 차원을 발견한다. (……) 어머니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의 법칙에 복종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머니의 욕망 그 자체가 타자(아버지)가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되는 대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제 아이는 소유의 변증법(팔루스의 소유 혹은 비소유)이 어머니의 욕망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러한 소유의 변증법이 아이 자신의 욕망의 체험을 지배하는 존재의 변증법에 영향을 미친다.


박탈자 아버지가 아이로 하여금 어머니가 아버지의 법을 인정한다는 것을 예감하게 만든다는 조건 하에서만 아이는 [자신이] 어머니의 팔루스인가 아닌가라는 개인적 질문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아이는 그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상계와 상징계를, 존재의 변증법과 소유의 변증법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아이는 자신이 팔루스가 아니며(존재의 변증법), 어머니처럼 팔루스도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소유의 변증법) 받아들이도록 강제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나타나는 ‘실재적 아버지’는 팔루스의 보관인, 즉 ‘상징적 아버지’로 승격된다(물론 이 아버지는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어도 된다). 이제 아이는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데 아버지처럼 팔루스의 소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자신에게 팔루스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거세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세를 통해 우리는 상징계로 진입한다.




3) 세 번째 계기 “어머니와의 주이상스(근친상간)는 금지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나를 동일시한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그것[법]의 충만한 의미[화작용]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법의 상징화이다. 이런 상징화의 [주체를] 구조 짓는 가치는 아이로 하여금 어머니의 욕망의 정확한 자리를 위치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에 있다. 아버지의 기능은 이런 조건이 충족되는 한에서만 법을 대표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법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아버지가 팔루스를 소유하고 있음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팔루스를 소유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팔루스의 박탈자가 아니라 어머니의 욕망을 안정적으로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재자가 된다. “존재의 차원에서 소유의 차원으로의 이행을 증명하는 이러한 선호는 아버지 은유의 과정과 그것[아버지의 은유의 과정]의 상관항인 심리내적 메커니즘, 즉 원초적 억압이 자리 잡았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버지 은유의 내재화는 또 다른 부산물, 즉 ‘초자아’를 생성한다. 보통 초자아는 도덕적 양심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라캉은 초자아에게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고 생각한다. 초자아가 금지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어머니와의 주이상스, 근친상간)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항구적인 욕망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즉, 법은 법을 넘어서려는 욕망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다. 그래서 초자아는 욕망을 규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주이상스를 즐기라고 말한다(단, 안전하게).






추가 사항

 

1. '베일'로서의 팔루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대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의 두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는 누가 더 그림을 잘 그리는지 대결한다. 제욱시스는 포도 그림을 그린다. 어찌나 잘 그렸던지 새들이 그림으로 날아와 쪼아 먹으려 했다. 이를 본 화가 파라시오스는 자기도 그림을 보여주겠다며 제욱시스를 화실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제욱시스는 어서 커튼을 걷고 밑에 있는 그림을 보자고 했다. 하지만 제욱시스는 곧 그것이 실제 커튼이 아니라 그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제욱시스는 자신은 새를 속였지만 파라시오스는 자기를 속였으니 그가 이겼다고 하며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다.

  라캉에게 중요했던 것은 결여’, 즉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을 어떻게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라깡은 팔루스를 베일이라고 말한다. “베일의 존재는 그것이 단지 주체 편에서의 유추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베일에 싸인 대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베일은 영원히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루스가 항상 베일에 가려진 채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고 가정할 때 남아와 여아 모두 팔루스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 팔루스는 우리가 상실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찾아 헤매지만 사실 그것은 애초에 우리가 가져 본 적이 없는 궁극적인 욕망의 대상이다.” 그래서 팔루스는 상상적인 동시에 상징적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킬 것으로 가정되는 대상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상상적이며 동시에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