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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무엇과 싸우는가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에 실린 단편소설 <청룡이 나르샤>를 읽었다. 시민들의 교통수단인 지하철에 대해 쓴 소설인 줄 알았는데 실은 K라는 연극 예술인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멋지게 전개된다. 2단으로 배치된 작품에서 왼쪽 텍스트는 지하철이 화자(사물의 의인화)이며, 오른쪽 텍스트는 K라는 아마추어 연극인에 대한 서술이다. 왼쪽 텍스트에서 지하철에 대한 많은 글귀들이 인용되고 뒤섞이며 착종된다. 그러나 그 얼개가 무엇인지가 도통 잡히지 않아 묵묵히 읽어가야 하는 아리송한 글이다.

이런 답답함은 오른쪽 텍스트를 읽을 때 완전히 해소된다. K라는 아마추어 연극인은 연말에 올릴 특선 작품을 써달라고 의뢰받는다. K는 자연스레 청룡의 해(갑진년)에 맞는 작품을 구상한다. 그렇지만 K는 여러모로 창작을 힘겨워하는데, "비문학 지문" 같다는 사람들의 평가 때문이다. 돈이 없을 때 머릿속으로 지어낸 정신과 선생님과 상담하는 상상에 빠져들기도 한다. K에게 조금은 이상한 습벽이 있다. 자동차 타기를 힘들어한다는 점이다. 덕분에 전철을 타고 주로 이동하며, 전철을 손으로 만지고 싶어 하는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수도권 1호선과 4호선, 두 개의 청색 노선이 만나는 동네에 자리를 잡고 나서 K 자신은 두 마리 청룡의 보호를 받아야 살 수 있겠다고 말하는 비유가 나온다. 이렇듯 중간중간 놀라운 문장들이 튀어나와 마음을 흔들어놓는 글이다.

위태롭고 여리여리한 K의 삶. K는 애초부터 세상과의 불화를 타고난 운명인지도 모른다. 공부를 잘해 연극 전공이 없는 상위권 대학에 입학했으면서 연극을 하고 싶어 하는 K. 그 흔한 자동차를 타는 것도 편치 않아 전철을 고집해야 하던 K. 연극을 써가도 "비문학 지문" 같다고, "어디 대학 나오셨냐"라는 비아냥을 듣던 K. 그렇지만 K는 화장실을 쓰려고 잠깐 하차했던 남태령역에서 다시 승차할 때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굳이 요금을 한 번 더 지불하고 타는 사람이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시민을 태우고 다니느라 지쳤을 전철 납작이를 위로해 줄 만큼 속이 깊다. 어쩌면 K가 삶에서 겪는 그 모든 균열은 오른쪽 텍스트의 도입부에도 암시돼 있는 것 같다. "시즌에 맞춘 커스텀! (중략) 섹시 산타 코스튬이나 위스키가 든 케이크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준비하면 되는 거"라고 말한다. 연말의 작업을 가리키며 부러 활기찬 어조를 가장하는 듯하다. 작품 왼쪽과 오른쪽 텍스트가 후반부의 "...... 당신에게 가려구요"라는 지점에서 간신히 만날 때, 또 그 만남이 얼마나 짧으며 영영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까지 예비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좋은 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K의 인생에는 확실히 비극적인 데가 있지만, 그것은 작가가 과장한 결과 같다. K는 예술가로서 세상과, 자신의 삶과 불화를 빚으며 삐거덕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K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제 나름대로 애쓰는 사람 같다. 전철을 쓰다듬으려는 행동을 역무원에게 제지당하고 나서 K는 "내 매력이 거기까지였나 보다"와 같이 서술한다. 자신의 부족한 매력에 대해 고심하고, 그 이상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게 인간적으로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게 이 작가의 페이크처럼 느껴졌다. K는 연극을 하는 사람이지만, 관객들에게 능히 소통되는 연극을 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비문학 지문을 읽는 것 같다"라는 말이나 듣는다. 그러한 비문학 지문 같은 예시로서 K가 쓴 연말의 작업이 왼쪽 텍스트에 제시돼 있다. 무척 멋진 글이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다. 아마 이 비문학 지문 같다고 놀림받던 텍스트에 얼마나 처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인지 한번 보시라, 하고 오른쪽 텍스트를 작가의 해설로서 내미는 것 같다. 물론 오른쪽 텍스트 속 K라는 작가의 이야기는 처연하고 애틋하다. 그러나 오른쪽 텍스트를 읽고 받은 감동은 우리에게 매우 낯익고 통속적인 데서 오는지 검토해 봐야 한다.


K가 써낸 비문학 지문 같은 희곡을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다. 1) 명문대에 진학하는 바람에 연극을 전공하지 않아 연출과 극작, 의상과 음향 등 모든 작업을 혼자 해야 하는 상황, 2) 자동차를 타지 못하는 선천적 성향. 1990년대 대중문화 코드 중 하나는 인물의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귀여움을 과장하는 기법이 자주 애용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1990년대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김건모의 <핑계>의 가사에는 상대방이 건넨 꽃 선물에 헤어지자는 말이 쓰여 있다며 화자가 울분을 터트린다. 그러나 이별의 메시지를 건네기 위해 그렇게 공들여 포장하며 뒤통수를 때리는 이가 어디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것은 화자의 감정을 꾸며내기 위한 얕은 수작에 불과하다. 이 소설 <청룡이 나르샤>에도 그러한 90년대식 감정의 과장을 위한 상황의 조작이 담겨 있다. 기차를 사랑해야 하는 K의 운명을 만들기 위해 자동차를 타면 힘들어하는 타고난 성향을 만들어내고, K의 고립된 예술가적 환경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작업을 혼자 처리해야 한다며 푸념한다. 결국 이 작품의 감동은 텍스트 내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90년대식 통속적 과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여기서 한 발짝 나아가 생각해 보자. K는 왜 그토록 고된 환경에서 힘겹게 예술해야 하는가. 구태여 왜 <청룡의 나르샤> 속 왼쪽 텍스트와 같이 일인 낭독극을 이어가며 관객과의 불화를 겪어야 하는가. 여기에는 현재 문학계나 연극계가 처한 문제가 스며들어 있다. 문학계에서는 수용자(독자, 관객 등)와의 소통이 어렵다는 점에 대해 자기 성찰을 시도하지 않는다. 독자 탓을 한 뒤 왜 내 작품을 알아주지 않느냐며 꾸준히 공급에 열중할 뿐이다. 그렇다는 증거가 작가나 출판사 들이 여러 방면에서 타먹으려고 하는 정부 지원금이다. 우리는 예술을 하고 있는데, 독자들이 몰라준다며 정부 요직에 앉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술(?)에 투자하라고 칭얼댄다.

문제는 <청룡이 나르샤>가 왜 세계가 아니라 수용자와의 소통에 대해 이토록 항거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 문예창작과 시스템 때문에 자신의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쥐어짜내고 있어서 그런 것도 같다. K가 쓴 희곡에 대해 "비문학 지문" 같다는 조소를 듣는 것에 대해 소설에서는 K의 분신으로도 보이는 친구가 전화해 "네 작업이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머리에 식판을 내리치고 싶어. 밥과 국이 가득 든 식판을..."이라고 말한다. 문예창작과에서 합평할 때 행해지는 합평에서 더러 발생하는 상처가 작가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가의 상처 경험이 독자에게 왜 중요한가. 작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비문학 지문" 같다고 했을 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사려 깊게 생각해 보려 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처절한 이야기를 꺼내놓아 방어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갖고 작품 오른쪽 텍스트의 초입을 다시 읽고 나면 처음과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 "시즌에 맞춘 커스텀! (중략) 섹시 산타 코스튬이나 위스키가 든 케이크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준비하면 되는 거"라고 말하는 것은 대중문화의 속물적 취향에 대한 조롱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대중문화의 코드에서 몇 걸음이나 나아갔을까.

우리는 독자와 소통이 불가능한 예술적인 작품, 실험적인 작품에 대해 원천적으로 다시 살펴볼 때가 되었다. 과거의 포스트모던 문학에서는 어떤 기존의 텍스트에 대항하여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는지 분명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문학 또한 뒤안길로 빠지고, 대학에서 문예창작과가 일반화되고 갖은 창작 지원금과 문학상 등이 제도화된 현재에 와서는 해당 작품이 반기를 드는 텍스트가 불분명하다. 지시 대상 없이 자신의 예민한 감수성을 선명하게 강조하기 위해 실험적인 작품을 내놓을 뿐이다. 소수의 예술가 취향과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만의 작은 공동체에게 헌신하는 작품들만이 남아 누가 더 처절한지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