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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대하는 시선은 크게 세가지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분들, 유대지역의 역사서로 보는 분들, 그리스신화 같은 판타지로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바라보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성경이 서구사회 정신문화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이후 유럽지역은 1000년 이상 성경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으며 유럽인들이 이주해 건국한 미국 역시도 근본에는 기독교 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흔히들 '고전'이라고 말하는 '근대 문학'의 수많은 저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읽고 배우며 성장한 이들이 대다수이며 그들의 인생관, 세계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즉, 서양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기본 지식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량이 상당하며 구약에는 연대기적 서술, 율법적 내용, 예언, 시가 등이 섞여있어서 일반 서적처럼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읽기가 조금 난해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 입장에서 문화적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라면 굳이 구약부터 먼저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후 내용부터 시작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 사건, 제자들의 전도 행적을 주로 보여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제자들을 기독교인(크리스쳔)이라 지칭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초지식 없이 구약의 창세기 1장부터 읽다가 신약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멈출 경우 '유대교'에 대한 부분만 읽게 됩니다. 성경 전체 분량에서 70% 정도가 구약이기 때문에 지쳐서 포기할 위험성이 다분합니다.



그러므로 신약부터 먼저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마태복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고대 그리스어의 syn(함께)와 opsis(봄)이 합쳐진 synopsis를 한자어로 직역한 것입니다. 세 복음서엔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주장합니다.



1장 1절부터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족보와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을까? 궁금해 하는 분들 계실텐데 양쪽 다 맞습니다. 마태복음의 것은 호적상 아버지로 되어 있는 요셉의 족보이고, 누가복음의 것은 어머니인 마리아의 족보입니다. 양쪽 모두 위로 올라가면 '다윗'에서 만납니다. 둘 다 기록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구약에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를 통해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족보를 따라 올라가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려야할 필요가 생깁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의 '헬리'가 마리아의 아버지 입니다.



예수님은 30대 초반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는데(누가 3:23) 그 전까지는 평범하게 '목수'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던 유대 백성들과 바리새인들은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유대지역의 변방인 나사렛에서 성장한 예수님의 어린 시절 모습을 많은 이들이 보았을 것이고, 학식을 쌓을 기회 없이 가업을 이어 목수로서 종사한 청년기도 목격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익숙하고 잘 아는..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세상에 나와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을 꾸짖으며 진리에 대해 외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복음서 내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충돌이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행동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 오랜 기간 메시아를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권인 '말라기'와 신약의 첫 권인 '마태복음' 사이에는 400여년의 공백기가 존재합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그들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예언자 혹은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열심을 내며 경건주의를 추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모세오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의 '율법'입니다.




(마태 3:16)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 밖으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 예수님께 임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3위(성부, 성자, 성령)께서 동일 공간과 시간에 각각 존재하시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여러 구절을 통해 해석된 교리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모두 존재하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한분 뿐이시다. 그러나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는 집합적인 개념은 아니다."

대략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이렇게 서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수훈)

5장에는 유명한 산상수훈이 나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이런 자들을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른바 여덟가지 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문장 자체로만 보면 삶에 대한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럴 경우 첫번째 '마음이 가난한 자'에 대한 해석부터 어렵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가난함의 반대는 부유함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부유하고 넉넉하면 복이 없다는 것인가요?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팔복에 대해 보다 정확한 설명을 위해서는 일곱번째의 '화평하게 하는 자'에 촛점을 맞춰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상식적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서로 화해시키며 화평하게 하는 이들을 볼 때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산상수훈을 해석하면 예수님의 제자. 즉, 기독교인들은 삶속에서 여덟가지 특성을 나타내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10)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새인은 스스로를 타인보다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반면 세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스스로를 남보다 낮게 여기며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마태복음 9:13)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들을 많이 고치셨습니다. 각종 불치병자들이 치료받고 건강해졌습니다. 분명 그러한 기적은 인간의 힘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날 기적을 행하신 경우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지켜보며 갈등했을 것입니다. 기적만 보면.. 혹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왜 하필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실까? 의심도 생겼겠죠. 바리새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면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바리새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해석을 위해 누가복음 13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모습으로 몸을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이 여인을 예수께서 치료하셨을 때에 회당장이 화를 내며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 말합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사람들에게 안식일엔 치료받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답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외식하다'는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꾸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외식하는 자(위선자, 형식주의자)'라고 꾸짖으십니다.





(마태 16:1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답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믿게 되는 그 믿음은.. 누군가에게 들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알게 하셔야 믿음이 생긴다고 설명하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부터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3일 후의 부활에 대해 알리셨습니다.





(마태 18장)

빚진 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나라의 왕에게 1만 달란트 빚을 진 종이 있었습니다. 그가 끌려왔을 때 왕은 말합니다.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종은 엎드려 절하며 다 갚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긴 왕은 빚은 탕감하고 놓아줍니다. 그러나 이 종은 나가서 자신에게 훨씬 적은 금액(1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자비없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둡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이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하나님께 큰 죄를 용서받았으니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이웃들을 용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태 20장)

포도원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외출합니다. 하루 일당으로 1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꾼을 찾습니다. 3시간마다 사람을 얻어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저녁 무렵에 나갔을 때에도 놀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여 질문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대답을 들은 포도원 주인은 그들을 데리고 포도원으로 들어갑니다. 날이 저물어 결산의 시간이 됩니다. 나중에 온 일꾼들부터 삯을 받았는데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1데나리온씩만 삯으로 지급됩니다. 그들은 놀라 집 주인을 원망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습니까?" 포도원주인이 대답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천국은 세상적인 논리와 상식으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일했다고 해서 더 많은 칭찬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 25:14)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타국으로 가며 자신의 종들을 불러 달란트를 나누어 줍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받은 것을 묻어 두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결산할 때.. 다섯 달란트로 이익을 얻은 종, 두 달란트로 이익을 얻은 종은 동일한 칭찬을 듣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들어와 땅에 묻어 두었던 한 달란트만 갖고 왔을 때 주인은 말합니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재능을 많이 받은 사람이 있고, 적게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많던 적던 그것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받은 선물임은 동일합니다. 그러한 재능을 주신 의미는 이렇습니다.



(마태 22:36~40)

어떤 율법사가 예수께 질문합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께 받은 재능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를 받은 사람은 자신 외에 한명을 도와주고, 둘을 받은 사람은 자신 외에 두명을 더 도와주고, 열을 받은 사람은 열 사람을 더 도와줘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자신의 재능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의 마음은 가난해져서 참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는 산상수훈의 말씀과도 통합니다.





(마태 24장)

세상의 끝날인 종말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흔히 요한계시록을 종말에 대한 예언이라 생각하지만 계시록에는 상징적 표현이 너무 많아 해석이 까다롭고 조심스럽습니다. 독창적인 해석을 주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반면 마태복음에 나온 예언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셨고 내용도 명확합니다. 크게 세가지 예언입니다.




1) 24:12 -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사랑이 식는 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고대나 중세에도 요즘과 마찬가지로 애정 없이 조건만 보고 결혼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았습니다.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도 많았습니다. 사람이 서로 속고 속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요즘 시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웃 간에 보편적인 정이 없는 시대입니다. 인정이 메마른 시대입니다.


(디모데후서 3:1~2)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어느 시대이든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사랑했지만 가장 구별되는 요즘 시대의 특징은 '개인주의'입니다. 지금보다 더 개인주의적인 시대가 있었을까요? '인정이 메마르고 사랑이 식은 시대'라는 표현에 정확히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2) 24:14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성경말씀이 세상으로 널리 전파되는 중요한 분기점이 세번 있었습니다. 첫째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공인받았을 무렵, 둘째는 중세 로마카톨릭이 사회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던 1천여년의 기간, 셋째는 세계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한 미국에 의한 선교입니다. 현재 성경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은 약 3% 정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3) 24:32 -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신학자들의 보편적인 해석은 이렇습니다. 구약의 (호세아 9:10)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이 문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무화과나무에 비유 됩니다.


이어서 마가복음 11장 13~14절입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이 구절은 이해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화과 열매가 달릴 시기가 아니라서 열매가 없었을 뿐인데 왜 예수님께서는 나무를 향해 저주하셨을까요? 이는 호세아 9장을 참조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리고 난 후 마태복음 24장 32절의 내용을 다시 읽으면 명확해집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오면 저주 받았던 '무화과나무(이스라엘)'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민족은 독특하고 유일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서기 66년에 발발한 제1차 유대-로마전쟁 이후 유대민족은 자신들의 거주지역을 빼았기고 로마제국 전역으로 흩어집니다. 이를 '디아스포라'라 부릅니다. 그때로부터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차별과 핍박을 견디며 2천년 가까이 정통성을 유지했습니다. 또한, 민족적 절멸의 위기라 할 수 있는 2차대전 유대인 학살을 겪은 후에 그들의 과거 거주지로 모여서 '이스라엘' 재 건국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는 모든 민족의 역사를 살펴봐도 유대인들이 유일할 것입니다.



마태 24장 32절을 다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앞으로의 계획은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히브리서, 요한계시록에 대해 올릴 생각입니다.

그런 후 구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