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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은 70년대 좌파 담론을 가지고 현대 서구 산업 전반의 문제점과 부작용들을 디자인의 관점으로 환원시켜, 제3세계까지 아우를 수 있는 대안적 시장 형성을 위한 다학제적 디자인 철학을 주창하는 디자인 사상서이다.
그의 논리는 제3세계와 자연을 향한 피상적이고 낭만적인 호혜적 관점과 현대 서구 사회에 대한 예리하고 분석적인 비판적 관점의 이분법에서 나온다. 그는 서구의 현대 산업이 만들어낸 비기능적 디자인 전반을 적극적으로 비난하며, ”좋았던 옛 시절“과 ”이대로 가다간“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의 경쟁적 디스토피아를 과거 혹은 미래 어딘가에 존재할, 혹은 존재했을 화합적 유토피아로 바꾸자는 태도를 가진다. 결국 책 전반의 논지는 유토피아 라는 엔드게임에 도달해야 할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2판을 기준으로 40년이 지난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의 자유 시장 경쟁의 가속화로 나타난 폐물화 현상과 좋은 디자인의 부재 사이의 상관관계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그가 전제하는 유토피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혹은 있었는가? 경쟁 없이 "더 나음"이 존재할 수는 있는 것인가? ”지속 가능한“ 이라는 표현에서 지속은 엔드게임의 현상 유지를 뜻하는가? 혹은 문제를 통제 가능한 범위에서 유지할 수 있는 성장을 뜻하는가? 그는 ”빵이 있는 곳에서는 이상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빵이 없는 곳에서는 빵이 곧 이상이다“ 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빵이 넘쳐 나는 곳에서 이상이 사라지고, 그저 새로운 빵을 원하고 낡은 빵을 버릴 뿐인 미국의 자본 시장이 부추긴 삶의 폐물화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바라는 세상은 모두가 약간은 궁핍한 세상인가? 제3세계에 대한 호의는 그러한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그의 글은 절름발이로 태어난 천재가 그려낸, 지구상 모든 인간들의 다리를 하나씩 자를 수 있는 기계의 청사진과도 같이, 탁월한 발상과 오싹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가 1판에서 비판 받은 문제. 자신에 대한 빈약한 비난이라고 깍아내렸던 “유토피아적 몽상”이라는 표현은 안타깝게도 그의 모순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말해 저자는 상당히 광범위한 귀납적 관찰 근거를 통해 서구 산업의 문제점을 비난하고 있으나, 그 관찰 자체가 다분히 이분법적인 편견에 갇혀있었다. “서구적 기준에 맞춰 디자인된 신발이 일본의 다다미 문화를 퇴장시켰다”는 단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난하고 굶주린 아이들이 벽의 페인트를 뜯어먹어 납중독에 걸리고 감염된 쥐에게 물려 죽는 것이 정말로 그 환경 구조물을 디자인한 "디자이너"의 책임이고, 그것을 저자 본인이 말하는 근본적 지점을 다루는 디자인으로 해결하면 되는 문제인가? 아이들이 뜯어먹어도 안전한 페인트 벽을 디자인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쉽고 간단하다고 제안하는 해결법은 고작 그러한 수준에 머문다. 서구사회가 그들을 망쳐놓지만 않았어도 그들 스스로 우리만큼 잘 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무형의 전제는 저자가 예리하게 제시한 구체적 사실들에 비해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그는 피상적 관찰을 문제의 근원으로 환원시켜버린다. 이러한 국소적 비판을 비껴가더라도 어찌됬건, 문제의 범위를 전지구와 전계층으로 상정해야한다는 그의 주장은 서구산업을 향한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었기에 오해를 샀다기 보다는 타당한 지적을 받은 것에 가깝다. 그는 13년 후에야 개정한 2판에서 설득력 있는 "변명"을 늘어놓을 뿐이다.
그는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디자이너들을 비난하지만, 사회적 책임에서 물러나 개인의 일상적 안녕에 안주하는 자들의 선택을 옹호하기도 한다. 그가 편협하고 협소하다고 지적한 문제인 “생산 구조 속에서의 책임감”은 전적으로 옳았기 때문이다(디자이너는 시장 뿐 아니라 생산 직원의 삶까지 고려해야한다). 결국 그는 디자이너인 자신이 위선자임을 자인하고, 자신이 편협하고 협소한 관점이라고 말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는 왜 이 “협소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가? 글의 논지를 이어가는 정치적 관점을 고려할 때, 이는 불가능했다기 보다 의도적 외면에 가깝다. 그가 가진 문제 의식의 전제는 기냐 아니냐의 문제라기보다, 규모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그는 구조와 규모에서 비롯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대안적 시장이라는 작은 규모의 다양성 증가를 유토피아의 토대로 삼는다. 그는 구조와 규모에서 창발하는 시장 단위의 혁신과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좌파적 이분법으로 바라본 현실은 그의 주장을 더더욱 모순적으로 만든다. 오만한 기업들의 무책임한 디자인이 결국 시장의 외면을 받았음을 비웃으면서도, 시장의 선택을 받는 섹시한 쓰레기들을 비난한다. 인구조절론을 들먹이면서도 본인은 두 명의 딸을 낳았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들이 마치 연필과도 같은 단순하고 효용적인 디자인이라 예찬하지만, 결국 40년 뒤에 남아있는 디자인은 별로 없다. 거친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교육이라는 가치관을 비난하면서 풍요로운 환경이 생물학적 발달에 훨씬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지만, 수동 기어 장치가 인간의 적응력을 개발, 유지 시킬 수 있는 인간적 디자인이 아니겠냐며, 자동 기어 장치가 정말로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냐고 반문한다. 상류층만이 향유 할 수 있는 값비싸고 우아한 허영에 대해 가짜 선택권이라 비난하면서, 값싸게 제작 공급할 수 있다고 주장한 디자인들은 미적으로 형편없다. 그리고서야 내뱉는 변명은 자신이 소외된 약자들의 미적 취향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는 말 뿐이다. 진정으로 좋은 디자인은 시장의 선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시장 선택을 옹호하면서도, 싸구려 디자인이 살아남는 현실에 대해 공급자들을 비난한다. 과거의 수공예적 디자인들의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그 유물들이 현대의 답은 아니라고 조소한다. 기능주의 디자인은 학생들에게 기능과 심미성 사이에서 혼동을 준다고 지적하지만, 그가 주장한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명제는 효용과 쓰임 사이에서 혼동을 준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부분과 전체>에서 썻듯이, 관찰은 이론을 전제로 하지만, 이론은 현실의 일부만을 포착할 뿐이다. 이론에 현실을 맞추려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모순을 내재한다. 현실은 동시적 병렬 구조이지만 이론은 선형적 직렬 구조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작금의 열화판 극단 좌파와 달리, 그 자신이 본인의 이분법을 초월하여 가능한 많은 인구층에게 효용을 가질 수 있는 디자인을 옳은 것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그 범위를 하나의 시장, 하나의 국가가 아닌 전세계로 확장해 제3세계를 위한 디자인의 도덕적 토대를 세운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잘못 디자인된 제품이 아니라, 효용과 기능, 그리고 다학제적 관점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디자인” 자체에 있다. 그는 원자력의 폐기물 처리 문제를 이야기하며, 원전 자체가 아닌 폐기물 처리 디자인의 빈약함과 그 폐해를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는 효용 없는 디자인 뿐만 아니라, 효용 없는 행위 일체를 비판한다. 그래서 그는 다다이즘, 추상 예술, 개념 예술의 비효용성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것들과 그들에 대한 조소 섞인 안타까움을 내뱉기도 한다.
그가 펼쳐놓은 다채로운 사례와 논의들은 굉장히 흥미롭고 설득력 있으며, 디자인의 사회적 가치라는 그의 선언은 지난 50년간 디자인 산업의 이념적 토대가 되어 오늘날 상당 부분이 현실화된 예언적 선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지적한 문제들이 40년이 지나서야 해결되고 있다는 점은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놀랍다. 그의 선언은 디터 람스의 10가지 디자인 원칙으로 변주되어 훨씬 온화한 방식으로 디자인의 책임을 일깨우고, 그가 마련한 철학적 토대는 애플이라는 상징적 기업으로 현실화되었다. (환경을 위해 충전기를 빼버렸다 자랑하고, C타입 싸구려 애플펜슬을 내놓으면서 가격은 비싸게 유지하는 모습이 우습기는 하다.)
어찌됬건 <인간을 위한 디자인>은 소외된 약자를 향한 낭만적이고 호혜적인 관점, 예리하고 분석적인 사실적 관찰, 더 나음의 전지구적, 전계층적 확산이라는 도덕적 선언, 과도한 디스토피아적 공포 조장, 낙관적 미래에 대한 근거, 정치적인 자기 변명과 위선, 진실된 자기 고백, 예언적 수준의 아이디어들과 실패작들이 뒤섞여있는 다채롭고 풍부하며 생동감 넘치는 책이다. 저자가 자신이 받은 비판에 대해, 자기 주장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때마다 “진실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고 말했듯이,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 여전히 위대한 책이라는 진실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애플 ㅅㅂ ㅋㅋ 저도 한창 좋아했는데 잘 읽었음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