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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안을 해소하는 자비의 길



불안한 인간의 가련한 운명

저자는 불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이력이 있다. 이런 독특한 이력 때문인지 철학적 글쓰기를 통해 세계를 보편적으로 설명하고 문학적 글쓰기를 통해 보편적으로 묶을 수 없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대상을 포착하려한다는 글쓰기에 관한 자신만의 철학을 제시했을 때 세계의 모든 것을 포착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포부가 느껴졌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철학적 에세이로서 철저히 실존주의적인 입장에서 논의가 시작되며 종교, 죽음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지 물음들의 끝에서 자신만의 결론을 내리는데 저자의 걸음을 하나씩 따라가볼 심산이다.


인간은 고독하다. 독립된 한 인간으로서 모든 행동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귀속되고 선택으로 인한 행복과 불행을 맛보는 것 역시 오로지 자신에게 돌아간다. 인간은 혼자라는 고독한 상황에서 무언가를 선택을 해야 하며, 그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 도덕적인 주체로서 판단하며 불안해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따라서 인간은 불행하다.


이에 더해 인간은 세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갈구한다.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간을 사로잡는다. 인간은 무언가를 아는 것을 넘어 삶 자체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려한다.


하지만, 어떤 경험과 이성을 통해서도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객관적이면서 절대적인 만족스러운 대답은 찾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수천 년간 삶의 의미를 정해주는 종교는 인간의 불안을 잠재우기에 안성맞춤일지 모르며, 인간의 불행의 틈바구니 속을 파고든다.


신의 품 안에 안긴 인간은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각 종교는 고유한 삶의 의미를 제시한다. 코플스톤은 <종교와 유일존재>라는 저서에서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유일존재라고 했다. 유일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단 하나뿐인 존재를 의미한다. 개체로 소외되었던 ‘나’라는 자아는 허상이며 궁극적으로 존재의 한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 체험은 나라는 개별 존재에서 세계와 하나인 유일존재로, 외톨이에서 영원한 세계의 일부로, 형이상학적인 전체 속으로 돌아가는 체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교를 믿음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나 안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 되돌아갈 곳이 있다고 경험적으로 감각할 수 없는 관념의 공간을 상정하는 것만으로 인간은 충분한 만족에 이를 수 있는가? 우리는 감각을 통해 현실을 살아가기에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가상의 공간과 세계를 상정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엔 무언가 모자라다. 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를 확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 종교적 체험이 주는 신비감과 안식과 희열은 주관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으며 굳이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다른 체험 이를테면 철학적 체험, 문학적 체험 등 각종 체험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이 종교라는 단어에 튕겨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인간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가지고 어둠 속을 방황한다. 이성이 비추는 미약한 빛 한 줄기를 따라 더듬거리며 나아가야만 한다. 우린 이성을 통해 감각하고 경험함으로써 삶의 의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결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절대적 존재를 믿으며 타계에서의 극락을 바라는 삶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굶주리고 헐벗은 자에게 따뜻한 스프와 옷을 제공하는 현실에서의 대심문관의 삶을 누릴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 정답은 없다.


진정 종교적인 삶이란 다시 말해 실존적인 물음에 답하는 인간의 인생이란, 확실치 않은 종교의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의미를 찾고 경험하며 실천하는 그 자체의 삶이며, 이 삶의 태도만이 진정한 종교적 인간의 탄생에 기여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흐려지는 촛불로서의 인간


죽음은 의식하는 주체인 나의 완전한 사라짐을 의미하기에 사실상 모든 것을 앗아가는 재앙이고, 죽음은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지 인생이 과연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인지에 관한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우리의 몸부림을 막아서고 모든 걸 무의미의 어둠속으로 밀어 넣는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생존이 전제되어야만 하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그렇다면 혹시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삶 자체의 궁극적인 가치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생물학적인 생존이 삶 자체의 궁극적인 가치나 이유가 될 순 없다. 먼저, 자살을 고려해보면 자살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반생물학적 행위지만 자살하는 누군가를 보고 우리는 고귀하고 멋있는 죽음이란 생각을 종종하기도 한다. 사회 구성원의 도덕성을 고양시키는 가치가 있는 자살의 경우엔 정당하면서도 의미가 있는 죽음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어떤 죽음은 삶의 긍정, 인간을 초월하는 거룩함마저도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생존이란 상황에서 내가 선택과 행동에 관한 윤리적인 수치와 반성이 뒤따르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을 최고의 가치로 삼을 수 없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속이고, 짓밟고, 착취하고, 무시한다면 그 수치심은 비윤리적인 나를 비춰 괴롭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윤리적인 주체로 살아야만 한다. 생물학적 생존의 욕구를 일부 희생하면서 남을 생각해야만 한다.


인간은 인간 가치의 절대적인 답변을 구하기 위해 고심하지만 그 답은 어쩌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난제인지도 모른다. 우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선택에 따라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한다. 그 선택은 하나의 인간을 그리고 한 인간의 가치를 만든다.


자비의 윤리학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의 삶은 인간의 동물적 생존을 초월한 무언가의 형이상학적 질서, 즉 도덕적인 절대 질서 속에 산다. 인간은 의식을 가진 주체지만 우리는 우리 의식 바깥의 대상인 도덕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실제 상황에서 무언가를 도덕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객관적으로 이 행동이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순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도덕적으로 확실하게 옳은 행동을 할 수 없는 옳은 삶을 살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 놓인다.


선은 윤리적으로 좋은 것이고, 가치있는 것으로 다른 선택들과는 달리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객관적이다. 하지만, 이런 존재로서의 선을 인간이 오류 없이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항상 오류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며 태도로서 선을 갖추어야만 한다. 결국 선한 의도, 동기, 태도, 궁극적으론 남에게 도움이 되는 태도,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런 것이야말로 무조건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절대적 기준과 평가방법이 없는 이상 덕의 윤리를 주목해야 한다. 윤리적 원칙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앞서 덕을 갖춘 인간이라면, 착하고 정직하고 관용과 지혜와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옳은 행위일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실하게 밝혀낸 상황을 토대로 행동을 결정한 후 결과를 고려해볼 수밖에 없기에 우리에겐 관용하는 태도, 자비의 태도가 가장 필요하다.


덕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이성을 통해 개발하는 산물이기에 덕의 내용은 개인, 사회에 따라 다른데 그것은 각기 사람들이나 사회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직관을 지녔기 때문이며, 상황에 따라 필요한 덕이 다르기에 상대적인 성향을 가진다. 덕이 서로 상이한 것은 당연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식인행위의 금지 등과 같이 덕은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이어야 할 부분이 있음은 자명하다.


기본적 덕은 절대적인 그 자체로 윤리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부차적 덕은 상대적인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도구적 가치를 지닌다. 내 행위가 누군가에게 해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윤리도덕적 존재로서 인간의 영역은 기본적 덕이 적용되어야 할 영역이다.


어떤 것이 기본적 덕이 될 수 있을까? 기독교의 박애, 유교의 인간됨이란 덕목이 있지만 아가페적인 사랑은 현실의 도덕 문제에서 모든 이들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실현 불가능한 기준, 설령 가능하더라도 모든 이들을 같은 정도로 사랑하기에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거나 판단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고, 인(仁)은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선이며 인인지 알 수 없음에도 선이란 무엇인지 인이란 무엇인지 확실하다는 인간 인식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절대적 확신에 기초하기에 인식에 한계가 따르는 인간으로선 따르기 어렵다.


저자는 윤리학의 기초로 특히 대승불교에서 보이는 남의 고통을 의식하고 함께 괴로워하는 ‘자비’를 제시한다. 자비는 인간이 설령 절대적 진리를 알지 못할지라도 선한 마음을 가지고 남의 고통을 덜어주고 자기를 희생하고 분담하려는 겸허함이 깃든 태도이자, 구체적인 상황에서 행위규범으로 실천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비를 바탕으로 고통을 지는 세계의 모든 존재로 자비의 대상을 넓힐 것을 주장하며, 인류중심의 윤리를 탈피해 인간과 운명을 같이하는 모든 존재들이 윤리공동체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하고 있는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학자의 결실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주의적 자유와 선택의 상황이 인간에겐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인식과 불교에서 말하는 욕망에 집착하는 것이 인간의 고통이라는 인식의 공통점에 착안해 저자는 혹시 인간에게 불안을 완화해주기 위해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안 그래도 최근 인류애에 대해 고민하며 구체적으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던 찰나 자비의 윤리학은 꽤나 적절한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다가왔다.


일평생 지식의 바다 속에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며 타인에 비해 방대한 지식을 쌓아왔음에도 절대적인 앎은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질문과 답변들을 조심스럽게 내놓는 저자의 겸허한 학구적인 태도는 무언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하나의 절대적인 답을 얻으려 했던 나의 불성실함을 향한 일침과도 같았다. 이 깨달음이 전해지자 내 존재는 거대한 세계 앞에 아득하게 자그만한 먼지티끌처럼 느껴졌다.


저자는 일평생 고민해 온 형이상학적인 난제들에 대답하기 위해 돌다리를 두들겨 건너듯 신중하게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며 자신의 답을 향해 걸어가는 철학적인 태도에서 어쩌면 저자는 글을 쓰고 사유하는게 아니라 혹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설령 저자의 논증의 설득력이나 정밀함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태도, 즉 철학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태도는 괴롭지만 유용한 태도임에 틀림없다.


요즘엔 책 한 권만 읽어봐도, 누구와 대화 한 번만 해봐도 이 사람은 세상사 모든 것을 확신하고 있구나 어쩌면 이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오만하기 그지없는 인간에 대한 환멸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던 와중에 노학자의 겸허한 태도가 절실하게 다가왔던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자신은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겸허함에서 시작하여 오만과 확신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않기 위해 하나의 답에 다가서려 철저하게 철학적 방법을 이용해 자신만의 길을 추구한 저자의 태도를 가슴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