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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후기 아감벤의 단편적인 에세이 모음집 <불과 글(윤병언 역)>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글쓰기는 여기서 신비주의적이며 시에 가까워지는데, <호모 사케르>나 <왕국과 영광>으로 잘 알려진 계보학의 톤과 비교하면 사뭇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문학이 불의 상실에 바치는 눈물이라는 관점은 오이코노미아에 대한 그의 비판과 대조적인 것처럼 보이며, 읽기의 불가능성에 대한 텍스트가 예언하듯 종종 언어가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지점마저 온다. 그럼에도 꾸준히 읽어내기를 시도하다보면 난해한 아포리즘으로부터 희미한 의미의 망을 구성해낼 수 있다.
<관료주의적 신비>는 이 단편 모음집에서 비교적 명확한 테마를 갖는 작품이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 이제는 완전히 내재화되어버려 누구도 의아하게 여기지 못하는 신비에 대한 글이다. 죄와 벌이 다루어지지만 어떤 속죄도 구원도 없는 법정의 신비. 신의 죽음 이후로 산뜻하게 의미를 내버린 채 법과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의 신비. 지하생활자도 초인도 아니지만 우리는 세상을 여전히 살아가며, 또한 '모든 것이 허용되는 세계'에서 어떤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벤야민이 이미 언급했듯 순수하게 의례만이 남은 종교로써 자본주의는 무탈히 작동 중이다.
이 세계 아래 죄와 벌은 필연적인 것인 반면 속죄나 구원은 불가능하다. 예루살렘의 대법원은 아이히만이 사용하던 사무실 IV-B4와 상동하다. 당시 검사였던 기드온 하우스너는 아이히만과 정확히 같은 유형의 인물이다. 무죄 판결은 단지 그가 기소당한 죄에 대해 '증거의 불충분함'만을 말해줄 뿐이지 죄 없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분석은 전적으로 한나 아렌트의 시선에 의존하는 것이겠지만 그가 틀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하우스너와 아이히만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가 얼마든지, 그리고 아이히만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가 얼마든지 유형학적으로 봤을 때 그들은 모두 동등하다. 가끔은 연극적이고 가끔은 히스테리를 부리며 타인을 장부 속의 수(數)로 다루는 삶 속에서 모두는 살아간다.
사유의 무능이 행위의 무능을 유발하며 행위의 무능이 곧 절대악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반대의 상황에 대해서도 상정을 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의 유능은 행위의 유능을 가능하게 하며 절대악은 달리 구성될 수 있는 것인가? 사유하기에 활동적인 삶은 진정 관료제적 수의 통치에 대한 대안을 형성 가능한가? 나는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으며,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는 필경사들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은 채 쓸쓸히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코헬렛의 말씀처럼 우리가 얼마나 영웅적으로 잘 살아내든 최후에는 심판이 온다. 세속화되어 있기 때문에 속죄와 구원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심판이.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코헬 11,9)
아감벤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죄가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아담의 권한은 동시에 우리를 비극적 얽힘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름이 붙여지기 전에 아무 것도 아니었던 사물들은 우리의 일부를 구성하며, 우리를 배려할 것이고, 우리는 그 배려에 감사하며 답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관료주의적 신비 역시 결국에는 인간이 최초의 명명권을 사용한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리라. 삶이 단지 존재하는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가공되기 위해서는 먼저 삶에 이름이 붙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름으로 존재하며 또한 타인을 존재시키는 죄에 대한 재판은 이미 진행중이지만, 그 범죄의 증거는 언제나 불충분하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받지 않는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그 형의 확정이 오직 죽음 이후에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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