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는 한 권 짜리로 대충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부분적인 시대를 다룬 개론적인 철학사를 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고대 쪽보다 뒤로 올수록 더 그렇다고 생각함.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남긴 글도 많지 않아서 통상적인 철학사에서 다룬 것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정말 본격적인 "해석을 통한 자기 철학"하기가 되어 버림


그렇지만 뒤로 올수록 상대적으로 철학자들의 저작에 담긴 내용 대비 철학사에서 다룬 내용의 비율이 확 줄어들기 때문에 조금 더 상세한 해설이 요구됨


그러니까 그런 효율성을 생각해서 책을 몇 권 골라 보자면


1. 고대 철학


그리스 철학사를 다룬 책을 따로 보느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직접 읽거나 그들을 다룬 책을 하나 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함. 이 입문 단계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은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별로 없고 더 깊이 파고들려면 거의 바로 전공자 수준으로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정도로) 가야하기 때문이니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남경희, 플라톤

: 국내 학자에 의한 종합적인 해설서니까 써주는 게 맞다고 생각함. 이게 아니면 크리스토퍼 로위, 플라톤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 논리, 수사학에 대한 "오르가논"과 "형이상학", "정치학"/"윤리학" 이 세 분류가 관심의 초점이 될 텐데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포함한 오르가논 파트는 입문자가 건드리기엔 쉽지 않은 부분이고 "윤리학"은 직접 읽기에 가장 쉬울 테니, "형이상학"만 놓고 보면


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주요 본문에 대한 해설, 번역, 주석

: 물론 조대호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있고 조금 낡았지만 여전히 유용한 로스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있지. 그렇지만 왠지 철학사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형이상학"의 중요 개념들-실체부터 시작해서 주르르 이어지는-에 대해서 조금 더 잘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국내 학자의 책을 골랐음. 다른 대안으로는 핼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입문"


앤서니 롱, "헬레니즘 철학"

: 롱의 이 책은 여전히 영어권에서도 표준적인 레퍼런스로 읽는 책인데 절판이라서 중고서점에서 엄청 비싸게 파네. 이거 빼면 대안은 호센펠더, "헬레니즘 철학사" 뿐.



2. 중세 철학


사실 중세 철학은 중세 전기와 중세 후기로 나누어 접근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어로 쓰거나 번역된 책 중 그런 건 없으니.


가장 추천할 책이 없는 시대이긴 해. 한국 중세 철학사 연구자들로는 이 시대를 커버할 수가 없고 (아마 자기 주 전공이 아닌데도 나눠 먹기로 맡았을 가능성이 높음) 번역된 책들은 죄다 낡았으니.


대안이 없으니 "처음 읽는 중세철학"을 권할게. 마우러의 책은 1982년에 초판이 나온 걸로 알고 있어. 존 마렌본의 책이 있는데 왜 이런 책을 골라서 번역하는지, 그 안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3. 근대 철학


이제 여기서부터 철학사 책의 효용에 대한 논란과 싸움이 본격화될 거야. 왜냐면 이젠 정말 '대부분' 혹은 '상당수'를 만족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해지거든. 캠브리지 철학사 시리즈(번역 안 됨)에서 17세기, 18세기, 19세기 이런 식으로 세기 별로 책을 내고 17세기 철학사는 두꺼운 책을 상하 두 권으로 낸 이유가 있어. 정말 엄청나게 연구되고 그만큼 해석도 다양하고 논쟁도 풍부했으니까. 철학사 책에서 훑어 본 내용으로는 왜 무엇을 가지고 싸움이 벌어졌는지 잘 이해하기 힘들어. 물론 고대 철학에도 그런 게 있지만 많진 않았지. 예를 들어, 플라톤의 "제3의 인간 논변"이란 게 철학사 연구자들 사이에선 논쟁이었는데 대부분의 철학사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어. 그러니 철학사 책만 보다가 플라톤에 대한 글을 보면 "어, 이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거지?" 싶을 수가 있지. 그런 게 근대 철학에서는 수두룩하게 쌓여 있어. 푸코와 데리다가 벌인 유명한 데카르트 해석 논쟁만 보더라도, 푸코의 책 한 구절에 대해 데리다가 시비를 걸고 거기에 대해 푸코가 맞받아치면서 둘의 철학관이 대립한 지점인데, 그 데카르트의 원문은 데카르트 해설서에서도 못 찾아볼 거야. 대략적인 개관에서는 그런 식의 논쟁이 크게 안 다루어지니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의 해석이 새로운 유물론적 해석의 실마리가 되었는데 그런 얘기도 통상적인 스피노자 개설서에서는 크게 다루지 않지.


그러니 여기부터는 제멋대로 간다.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 방법서설은 혼자 읽어, 그러라고 쓴 책이니까. 데카르트의 주저는 "성찰"이야. 영어권 책이라면 "성찰" 본문과, 당대 지식인들의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변까지 묶은 편집본이 매우 유용해. 그런데 우리나라엔 없네? 어쩌겠어.


라이프니츠, 책 추천 포기

: 이유는 안 가르쳐줌. 학자 공동체에서 합의된 좋은 개설서조차 없는 상황임.


진태원, 스피노자의 "윤리학" 수업

: 어차피 "윤리학"은 읽어야 하고, 대안은 별로 없음.


김효명, 영국 경험론

: 품절이지만, 돌아가신 분이라 적어봄. 도서관에서 구해서 보면 어떨까. 보통 철학사의 맥락에서는 근대 철학을 인식론의 맥락에서 조명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 점에서 지각, 인상, 지식 등의 주제에 대해 정리해 놓은 책이라 사실 나쁘지 않음.


4. 칸트부터 헤겔까지


진정한 고통의 시작이지.


칸트, "순수이성비판"

: 이 책을 직접 읽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은 태평양 정도로 벌어져 있다. 안 읽은 사람이 칸트 이후 철학에 대해 얘기하는 건, 바다를 건너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 얘기 하는 거야. 다른 책의 도움을 받건 안 받건, 이 책은 꼭 읽어라. 대안이 없다. 뭐 김상환, "왜 칸트인가" 정도를 읽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고. "순수 이성 비판"의 해제나 요약서는 꽤 있으니 아무 거나 보셈. 오트프리트 회페의 "칸트"는 참 좋은 책인데 번역이 개같음. 씨발 개새끼. 원문 대조 해봤음. 첫 챕터에서만 오역 수십 개 잡아냄. 좋은 책이라 더 열받음.


프레더릭 바이저, "이성의 운명 - 칸트에서 피히테까지"

: 바이저의 "헤겔", "헤겔 이후"도 함께 권함. 테리 핀카드의 "헤겔"은 사상적 평전인데 다른 입문서보다 이게 더 나을 수도 있음. 품절이니 도서관에서 구해 볼 것. 홀게이트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 괜찮음. 코제브의 책은 역사적으로 영향력 있었지만 굳이 지금 읽어야 하나 싶고, 이폴리트의 책은 입문자 나부랭이를 위한 책이 아니니 생각도 하지 마라.


"헤겔 이후"를 봤으면 헤겔 이후의 시대에서 쇼펜하우어와 니체만 쏙 뽑아서 읽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알게 될 거다. 여러 논쟁을 거쳐서 승리는 신칸트주의 강단 철학자에게로 돌아가고, 그 다음에 온 혁신은 훗설임. 쇼펜하우어는 취향을 탄 거고, 니체는 늦게 발굴된 것(그것도 여동생이 난장을 친 "힘에의 의지"라는 이상한 책의 사후적 인기를 통해서)에 가깝다. 나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고 전체적인 철학사의 흐름에서 헤겔 이후 '많은 철학자들' 중 한 명들이었다는 거지. 당시엔 별로 영향력이 없었다. 지금까지 언급된 근대 철학자들이 집필 활동을 하던 시기에 대화와 논쟁의 중심에 있던 장본인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들은 사후에 더 커진 철학자들이 맞아. 그러니 취향에 맞으면 따로 봐.


5. 더 제멋대로인 현대 철학


단 자하비, "훗설의 현상학", "현상학 입문"

: 전자는 훗설의 현상학적 기획에 대한 친절하고 명쾌한 해설서이고, 후자는 훗설에게 의존하지 않고 현재의 시점에서 현상학적 운동이라고 불리는 철학적 사조의 중심적인 유산이 무엇인지 재구성해서 정리한 책.


부르디외,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 하이데거 빠들이 너무 많아서 일부러 고름. 하이데거가 나치 경력 이후 독일에서 완전히 묻혀 있었는데, 뒤늦게 그를 발견한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를 초청하며 강연도 요청하고 그러니까 실의에서 빠져나와 신나서 프랑스의 환대를 즐겼다. 프랑스에서 하이데거를 찬양하는 시대적 분위기 덕분에 독일에서 다시 슬슬 하이데거를 논의하게 되긴 하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하이데거 찬양의 가장 중요한 진원지는 프랑스였다는 걸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상학과 신학의 친화력이 (우린 잘 모르지만) 미국 철학과의 절반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이 하이데거 수입의 또 다른 토대가 되었고. 한국에서 외국 철학의 수입을 주로 프랑스를 통해서 하다보니 하이데거가 엄청나게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를 다룬 저작의 비중이 말도 안되게 높다) 이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재평가를 해도 되지 않나 싶다. 일단 들뢰즈만 하더라도 하이데거와 유의미한 공감이 별로 없잖아?? 안 그래??


슈워츠, "분석철학의 역사"

: 지금으로서는 분석철학의 전체적인 개관을 위해 가장 참고가 될 만한 책. 이 책을 읽었으면 (굳이 분석철학에 대해 좀 더 수상하게 생각하면서 더 알아보고자 한다면) 글로크 "분석철학이란 무엇인가"와 제이스 & 레이놀즈의 "분석철학 대 대륙철학"을 읽어보면 나쁘지 않다. 긴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과거의 철학과 대서양 건너 동료들의 철학과 친화력을 회복하고 있는 영미 분석철학의 현재적 위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삶과 죽음"

: 마틴 제이의 책은 너무 오래 전이고, 최근에 나온 재밌는 책도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붉은 출판사(?) Verso에서 나온 책이고 최근에 번역되었다.



사실 철학사 책을 쓰기에 좋은 쪽은 현대 대륙철학보다는 영미철학쪽이다. 왜냐면 영미철학은 개인의 철학체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것보다 문제 중심의 논쟁사로 이루어지기 때문. 그러니 시간이 좀 지나고 논쟁이 정리되면 철학사 책을 쓰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에 비하면 대륙철학은 개별적인 저자들의 세계인데, 이들을 따로따로 다루자니 전체적인 시대적 배경과 공통의 문제의식, 영향사가 잘 안 보인다. 그런 쪽을 치중하며 쓴 책들이 없는 건 아닌데 한국어로 나온 게 없고.


그러니 하이데거 이후 대륙 철학을 다룬 철학사적인 책은 그냥 패스하겠다. 차라리 몇 개의 글들을 소개하며 몇 가지 계보도를 그려서 설명하는 게 더 좋을지 모르겠는데 그걸 여기에서 할 이유도 없고.


마지막으로, 정신분석은 물론 임상에서 사용된다는 점에서 정신(임상)의학의 일부이고 심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심리학의 하위 분과이긴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약간의 의심스러운 가정들(혹은 증명불가능한 사변적 가설들)과 완벽하게 입증한다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애매한 경험적 증거를 곁들인, 매우 독특하고 사변적인 인간 존재론이라고 생각한다. 임상에서 사용되지만, 임상에서 사용되는 기법들은 수십 종은 거뜬히 넘어갈 정도로 많고 다른 기법에 비해 정신분석이 더 나은 효과를 보인다는 증거는 없다. 게다가 정신분석은 치료의 어려움을 전제하는 독특한 기법이어서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이론적으로 공격받으면 '임상의 테크닉'이라고 도망가고, 임상에서의 효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 주요 가설의 이론적인 매력으로 도망갈 수 있는 거지. 아무튼 정신분석 참 좋아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도 이걸 '안전한 학의 길'에 올려놓는 게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그러니 프로이트 - 라깡으로 넘어가는 계보도 패스하자.


그냥 날로 먹으려면 그런 거 잘 하는 일본 저자들의 책을 읽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은근슬쩍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게 흠이지만 (예를 들어, 도주론이나 구조의 힘이나) 현대 사상의 파노라마에 대해서 몇 권의 책이 나와있으니 그걸로 시간 때우고 있으면 더 좋은 책이 나오겠지.


도움이 안 되었다면 미안. 그냥 읽은 책의 스펙트럼 자랑한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주라.



부록.


1.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사는 딜스 & 크란츠 두 사람이 그리스어 원문을 다 모아 수록한 편집본을 냈는데, 그게 독일어로 된 책이고 그 이후에도 발견된 단편들이 생겨나서 커크 & 레이븐이 1960년대에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라는 책을 냈음. 맬컴 쇼필드가 추가되어 개정판이 나왔고 현재까지 표준적인 레퍼런스임. 해석까지 된 걸로 고르자면 1978년에 나온 조나단 반스의 The Presocratic Philosophers를 여전히 많이 봄. 독갤에는 아는 사람이 좀 있겠지만 소설가 줄리안 반스와 형제임.


2. 플라톤을 다룬 책은 잘 모르겠고 Jonathan Lear가 쓴 Aristotle : The Desire to Understand 가 나왔을 때도 호평을 많이 받았고 여전히 좋은 입문적 해설서로 평가받는 걸로 알고 있음. 그리스 철학은 철학자나 문헌이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역량있는 학자가 평생 파먹을 대지가 이젠 없음. 연구될 만큼 연구되어서. 그래서 리어 이 양반도 은근슬쩍 삶의 지혜 어쩌고 하는 쪽으로 우회하더니 근래 몇 년 동안은 프로이트 파먹고 있음.


3. 중세철학은 John Marenbon이 쓴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나 그가 두 권으로 낸 후 나중에 한 권으로 개정한 중세 철학사 입문서가 그나마 지금으로선 최선으로 보임. 스콜라 논리학/수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습을 넘어 독자적인 언어철학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나 중세 과학사 그리고 정치적 배경과의 관련성 등 연구 시야가 넓어지면서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모습으로 조금씩 재조명되어 왔는데, 중세철학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한 진입 장벽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기본이고, 라틴어는 당연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 때문에 아랍어도 읽어야 하고 등등) 그런 걸 다 종합해주는 책은 천천히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임. "빈틈 없는 철학사" 시리즈를 쓰고 있는 피터 애덤슨이 그런 중세 철학 전공자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함. 존나 공부했는데 철학사에서 자기가 공부한 시대를 대충 날로 먹고 넘어가는 걸 보는 게 얼마나 열받겠음. 그의 철학사 시리즈 중에서 "중세 철학" 파트는 빨리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함.


4. 근대 철학사를 다루는 깔끔한 저작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 졌음. 1960~70년대 영미권 (주로 미국) 철학계의 철학사 이해 수준이 높아지면서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의 중요 철학자들을 정리한 책들이 몇 개 나왔는데 (세 명씩 묶든가, 여섯 명을 다루든가 하는 식으로) 교육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긴 했겠지만 1980년대 이후 그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런 책들을 쓰려는 저자들이 나오지 않게 되었음. 혼자서 데카르트 하나 중심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공력이 많이 필요한데 감히 데카르트-라이프니츠-스피노자를 묶어서 다룬다고? 동료들에게 무슨 욕을 먹으려고? 뭐 그런 식이 아니었을까.


5. 그럼에도 대가급 고수들은 계속 나오고 있고, 대륙의 근대 철학사와의 교류도 활발해짐. 프랑스의 근대 철학사 연구는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가장 독보적인 수준이었지만 미국에서도 그런 연구들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성장한 철학사 연구자들이 1970~80년대 이후엔 나오게 되었다는 얘기임. 고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철학사 연구자들 중 지도적인 대가들은 대부분 언어 능력이 괴수급임. 유럽의 철학사 연구를 참조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 한국에 소개된 책들은 그런 사람들의 것이 없고 분석철학 계보에서 '분석적'으로 주요 논증을 다룬 책이나 아직 수준이 일천한 시대의 것들을 소개했음. 아니면 독일에서 공부한 놈들이 자기 스승들 책을 번역하거나. 좀 안타깝게도 독일에서는 영미쪽 연구를 거의 참조하지 않고 살았는데 (학계의 규모와 풍토가 다름. 미국 철학사 학회 같은 물량의 존재를 장기적으로 이길 수가 없음) 그 결과 철학사 연구에서는 오래 전에 역전되었다고 보는 게 맞음. 심지어 자조적으로 칸트 연구하려면 미국 가야 한다는 말을 독일 대학에서 가끔 할 정도로. 그래서 나온 현상이, 1960~70년대 이전까지 나온 프랑스나 독일의 묵직한 연구들을 공부하며 성장한 영미의 철학사 연구자들이 20세기 말이 되면서 생산적인 성과를 내놓는 동안, 독일과 프랑스 학계에서는 그만한 생산력이나 이전의 선배들처럼 묵직한 영향력을 지니는 신진 학자들을 내놓지 못함. 단적으로 그걸 보여주는 예가 있는데, Beatrice Longuenesse라고 엄청난 학위 논문을 내놓으며 등장한 천재적인 철학사 연구자(칸트 헤겔 전공)가 있는데,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하고 있음. 마르쿠스 가브리엘도 동료와 청중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은 독일이 아님.


6. 아무튼 그런 성과들이 그나마 최근에 집대성된 게 Cambridge History of Philosophy라고 볼 수 있음. 난 전질을 다 갖고 있는데, 학부 고학년에서 대학원 과정까지 레퍼런스로 쓸 만함. 거기 기고한 (비교적) 젊은 철학자들이 이젠 자기 분야에서 중진 원로급이 되고 있지만.


7. 또 아무튼 한국의 지식교양층이 서양의 당대 철학에 대해 아직 잘 모를 때 주된 수입루트가 프랑스 - (일본) - 한국이었고, 유학생들이 많이 건너가고 그와 동시에 영미에 프랑스 철학 동조자들이 (주로 비교문학과나 B급 대학 철학과를 중심으로) 세를 불려나가면서 그쪽도 수입하게 됨. 메이저 대학에서는 프랑스 현대 철학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음. 하지만 메이저 대학에서 주로 하는 게 분석철학 아니면 (신학과와 친화력을 가지는) 현상학이고, 그걸 제외하면 정치철학/윤리학 등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분야, 그리고 철학사 연구인데 그래도 20세기 말부터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위기라는 문제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 대화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지긴 함. 그런데 프랑스 철학계는 '작가로서의 철학자'가 여전히 존재하는 풍토이고 그러니 스타가 계속 나와줘야 수요가 생기는 문화임. 그 수요는 앞서 말한 비교문학-지방대 철학과의 아웃사이더들이 만들어냄. 영국으로 치면 옥스퍼드, 캠브리지에는 자리잡지 못하고 에든버러에 있는 사람들 (에든버러가 그래서 프랑스 철학 수입 재가공의 원산지임). 그 중에서도 특히 전위적인 철학자들이 유럽 대학원에서 유럽의 동료들(바디우, 지젝, 말라부 등등)과 함께 강의도 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건 들뢰즈임 (그래서 이들이 신유물론의 중심적인 인물들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철학 오퍼상들은 자꾸 이쪽만 수입해서 소개하는데, 정작 다른 학문과의 대화, 현실에 대한 개입, 철학과 동료들과의 소통에서 얼마나 생산적인지는 잘 모르겠음. 신경도 안 쓰는데 역으로 비웃기나 하지. 하지만 마이너라는 현실은 좀 인지할 필요가 있는 것 같음. 우리나라 청중들에게 강의 팔아먹는 걸로 철학한다고 할 수는 없잖아. 그게 최선이야? 그게 최선이냐고.


8. 그래서 일반인을 위한 벤야민 강좌 같은 걸 도대체 왜 하는지 잘 모르겠음. 영미의 지식인들 수준을 은연중에 낮게 보는 것도 우습고. 솔직히 미국의 흑인 여성 작가들이 우리나라에서 철학 수입한 거 어설프게 소화해서 (몇 년 지나면 들쳐도 안 볼) 조악한 수준으로 팔아먹는 철학 연구자들이 세상과 교양에 기여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을 해왔는데, 20세기 미국 흑인 여성작가들을 다룬 책조차 찾아보기 힘듦. 이게 정상일까 나는 잘 모르겠네.


9. 철학사 책 봐봤자 이렇게 무능한 궁시렁쟁이로 나이만 먹게 됨. 정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