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7cea8070b48a60f23fee85e1449f2e2db6aedf05cd8fcdd14c74d344



꿈 속의 현실, 현실 속의 꿈


아 오늘도 빌어먹을 출근이구나


비몽사몽간 지하철에 몸을 실은 뒤, 지하철이란 녀석도 사실 움직이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만 하는걸까?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일하러 가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나와 동일한 운명체가 아닐까? 나는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데 지하철이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망상 속에 잠겨있는 와중에 옆에 있던 여자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뺏다 넣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오호 부스스하게 보이는 저 여자는 아침에 늦장을 부린 탓에 화장도 머리세팅도 안했기에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동안 헤어롤로 앞머리 볼륨도 줘야하고 분도 찍어야 하고 입술도 발라야만 하기에 바쁘구나 바뻐.


급기야는 고데기까지 꺼내 머리를 몇 번 빗어 제끼는 모습을 보고 저기요 고데기를 거울 안보면서 할 수가 있나 제가 거울 대용으로 핸드폰 카메라라도 비춰드릴까요 낄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혼자만의 농담 따@먹기를 하는 와중 그 여자는 내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짜증나는 표정으로 황급히 지하철에서 몸을 내뺐고 또 다른 여자가 지하철로 들어오는데 안쳐다볼래야 안쳐다볼 수가 없었다.


통화하며 상사욕을 야무지게 하는 그녀는 논리정연하게 상사의 잘못됨을 상대에게 고했다. 듣는 나마저 그녀석이 잘못했네 생각케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얘기하지않고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하는 막지 못할 의지!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망과 더불어 자신을 표출하려는 욕망, 이런 욕망들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거다. 나는 지하철이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꿈꾸는 갖은 욕망에 대해선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행하는 이들의 욕망이 온당한건가..? 싶기도 했다. 난 그냥 눈을 감고 꿈에 빠지기로 결심한다.



난 꿈속에서 딩씨마을을 지켜보았다. 옌롄커의 <딩씨 마을의 꿈>은 인간이 꿈꾸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로 딩씨 마을에서 매혈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됨으로써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서로의 물건을 훔치고, 간통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세상사를 보여줌과 동시에 피를 채취하면서 에이즈를 옮긴 것에 더해 죽음을 앞둔 병자들의 피를 빠는 모기 같은 인간과 그를 단죄하려는 노인의 이야기다.


그들의 갖은 욕망은 갖은 색깔들이 제시하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을 가진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관련하여 때로는 얼굴이 빨개지고, 무언가에 질려 노래지기도 하고, 무언가를 두려워하여 하얘지기도 하고, 분노에 차 피가 솟아 파래지기도 하고 거메지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들이 딛고 서있는 대지 역시 마찬가지다. 대지는 노을 진 석양에 비춰 빨개지기도 하지만 인간들이 꿈꾸는 황금빛 가득찬 날알들의 결실로 노래지기도 하고 새로운 욕망의 약동으로 싹이 터 파래지기도 했다가 잿빛과 같이 황폐해져 거메진다.


색채의 변화무쌍한 변화 속에서 욕망이 이뤄지고, 인간이 이뤄지고, 세계가 이뤄진다.


등장하는 병자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인간적이다. 인간은 내일 당장 죽음을 앞두고서도 정당한 몫을 요구하며 정의를 부르짖거나, 아내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빨간색 저고리를 훔치기도 하며, 규칙을 제정하며 절대자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떠올리게 한다.


곧 죽을놈들이 왜? 라는 물음이 끊이질 않았지만 병자들 역시 그저 평범한 인간이다. 내일 죽는다고 해서 그들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고 그들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의 직면을 마법의 주문삼아 모든 걸 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특히 딩량과 양링링의 용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들은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배우자들로부터 버림받다시피하곤 서로에게 빠진다. 이 사랑은 사실 이 소설의 찐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절절하다.


그들은 허용된 시간동안 서로를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며 절대적인 사랑을 퍼붓는다. 링링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자기 몸에 얼음장 같은 물을 부어 딩량의 열을 식히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링링이 죽는다는 가정 속 혼자라도 계속 살고 싶어했던 양아치 같은 딩량도 링링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링링의 죽음을, 자기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한 링링의 죽음을 보곤 스스로 자기의 다리를 베어 피를 흘리며 죽는다. 그의 다리에서 솟구친 빨간 피는 흘러흘러 링링의 하얀치마를 빨갛게 물들이는데, 그건 빨간치마를 입고 죽고 싶어한 링링에게 주는 딩량의 마지막 선물이자 진정한 사랑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의미를 찾고 사랑을 찾는 그들의 인생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우리 모두가 이런 의미를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일 거다.


딩량과 양링링의 사랑 이야기 이후 이야기는 급속도로 활기를 잃는다. 산 사람은 살아야하듯 이야기는 죽은 사람을 내버려두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걸까? 화자가 딩후이의 열두살 난 이미 죽은 아들이라는 점이 그 점을 더욱 강하게 추단하게 한다. 죽음이 세계의 시계바늘을 멈추게 하진 못한다.


웃음과 찡함을 안겨줬던 인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생명력을 잃어버린 환자들과 그 환자들을 상대로 돈을 버는 딩후이, 그걸 지켜보는 딩후이의 아버지 딩수이양의 최후의 결전이 벌어진다.


비위생적 환경에서 피 뽑아 에이즈 창궐의 책임이 있는 딩후이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부여된 관을 빼돌리고 영혼결혼식 명목으로 수많은 돈을 착복해 가늠하지 못할 부를 축적한다.


딩수이양은 아들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 개두하고, 용서를 빌며 아들의 타락과 욕심에 최후의 일격을 날린다.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물질 문명에 잠식당해 허우적거리는 욕망덩어리인 아들 딩후이에 대한 도덕적 단죄는 관공묘를 숭배하던 노인이 말아주는 강호의 도리이자 영혼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그 후 마지막 엔딩부분은 꽤나 인상깊다. 감옥에 다녀온 딩수이양은 열병에 걸린 이들이 모두 죽고,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이사 가버린 딩씨 마을을 배회하며, 인간이 볼 수 없는 최후의 광경을 목격한다.


쏟아붓는 것 같은 소나기 속에서 할아버지는 드넓게 펼쳐진 평원 위에서 한 여인이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버드나무 가지에 진흙을 묻혀 높이 흔들고 있었다. 한 번 흔들자 땅에 수많은 진흙 인간들이 생겨났다. 다시 한번 진흙을 묻혀 흔들자 또다시 땅 위에 수천수백의 인간이 생겨났다. 쉬지 않고 진흙을 묻혀, 쉬지 않고 흔들어댔다. 땅 위에 온통 진흙인간들이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진흙 인간은 비 오는 땅에 물방울만큼이나 많았다. 할아버지는 새롭게 펄쩍펄쩍 뛰기 시작하는 평원을 보았다.


새롭게 펄쩍펄쩍 뛰는 세상을 보았다.



이 결말은 너무나 아득한 우리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시간 속에서, 한 인간의 시대는 먼지티끌만큼도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한 시대가 저버리면 다른 새로운 시대가 떠오르는 자연의 섭리를 의미하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건 묻히고 마는가?


인간의 욕망은 찰나의 욕망이며, 우린 곧 땅으로 스러져갈 운명이다. 하지만 이 찰나의 순간은 영원한 허무니까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보기 보단 찰나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중요해 보이는 건 왜일까?


우린 눈을 얇게 뜨고 인상을 쓰면 어렴풋이 보일 것만 같은 환상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찌푸린 상태를 영원히 지속할 수 없듯 눈을 다시 크게 떠야만 하고, 크게 뜬 눈에서 보이는 현실을 마주해야만 한다.


아들을 향한 딩씨 노인의 도덕적 단죄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속이 답답한 건 매한가지다. 설령 이야기 속 단죄는 이루어졌다할지라도 작품 밖 세계 속 많은 욕망이 빚어내는 죄악은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이런 죄악에도 세계는 도도하게 새침떼며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딩씨 마을의 꿈>은 딩씨 마을을 벗어난 세계에서도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딩수이양의 꿈에선 자신이 직접 목격하지 못할 사실들을 보기도 하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기도 하고, 진정한 인간의 사랑을 발견하기도, 사랑을 뒤트는 거대한 욕망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환상적인 꿈이 드러내는 것은 철저한 현실이며, 살아 숨쉬는 인간의 빌어먹을 욕망이며 사람들이 그동안 외면해온 욕망의 뒤틀림이다.


딩씨 영감은 꿈에서 현실에 눈감는게 아니라 현실적인 공간에서 자기가 볼 수 없는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직시한다. 이런 특성은 하나의 문학적 수법으로 환상성을 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작품 속 꿈 의 역할에 내포되어 있는건 아닐까?


옌롄커는 <딩씨 마을의 꿈>을 통해 분명히 존재했던 현실적인 문제들을 외면하고 아름다움만 인간의 아름다움만, 세상의 아름다움만 보지 않는다. 그는 모두가 감추거나 보지 않으려했던 것들을 들춰내 고통으로 가득 찬 가라앉은 하나의 세계를 꿈속에서 침몰선을 인양하는 것처럼 건져 올려 세상에 드러낸다.


<딩씨 마을의 꿈>이란 작품은 무엇이든 말하며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부르짖는 옌롄커의 꿈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작품이며, 피를 토하며 현실세계에 상소를 올리는 그의 절절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모든 사람들은 꿈을 꾸고 그 꿈에는 욕망이 또아리를 튼 뱀처럼 도사리며 탐욕스러운 혀를 낼름거리고 있다. 하지만 그 꿈의 방향이 과연 올바른 걸까? 딩씨 할아버지의 꿈 속엔 이제 한 번쯤은 뒤를 돌아봐야할 때라는 옌롄커의 꿈이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다. 나는 옌롄커의 꿈을 이불삼아 그 꿈이 나에게도 나타나길 바라며 잠을 청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