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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상환 교수님의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과 같이 병렬독서 하였다.
이 책은 벤야민을 위한 입문서로, 에밀 앙게른의 역사철학 개론서를 위한 배경지식을 쌓기 위해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은 후 역사철학에 대한 모든 관심이 내 마음을 떠났다.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은 아우구스티누스, 맑스, 벤야민의 역사철학과 세속화에 관한 성찰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세속화의 테제로
시작하는데 칼 뢰비트 글 인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근대 세계는 수 세기간의 세속화 과정의 귀결이며, 따라서 동시에
기독교적이면서 비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다. 이 문장은 이 책을 읽는 모든 과정에서 계속 상기되며 울려 퍼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서술일 수 있다. 여기서 호명되는 거의 모든 철학자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신학적 문제틀에서 전적으로 벗어난 역사이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적
역사 이해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관을 세속화한 결과이며 기독교 역사신학의 기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맑스는 분명 이런
목적론적 변신론적 역사관에 대하여 항의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자를 완벽하게 피해갈 방법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포이어바흐로부터 내려오는 맑스의 유물론은 분명 보다 혁명적인 생각들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맑스에 드리워진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림자는 그의 역사적 유물론이 칸트와 헤겔에 거대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의
계몽주의자들은 계몽을 향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이성을 신화화하고 만다. 이성은 자기 외부의 정당성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정당성이자 자기 목적으로 고양된다. 신화화된 이성은 세속화된 역사신학으로서의 역사철학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신화화된
이성이 뒷받침하는 진보의 신화에는 인류가 겪고 있는 고통과 재앙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시도했던 변신론의 문제 설정을
끌어들이고 이런 기독교 역사신학의 기본 골격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환속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몽주의적 역사관을 대표하는 헤르더와
칸트 그리고 헤겔에게서는 통적으로 '역사 속의 신' 이라는 주제가 포착된다.
헤르더에 따르면 자연과학자들이 밝히는 자연법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자연 곳에 신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봤으며 그런 그의 역사철학에 자연이 부여한 목적이 존재한다. 이 목적은 인간의 진보와 일치된다.
이런 자연목적의 존재와 인간 역사의 진보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은 칸트의 역철학에서도 발견된다. 칸트는 헤르더와 마찬가지로 이런 자연목적의 최초의 원인으로 신의 존재를 호명한다.
기독교적인 신의 섭리는 그렇게 자연법칙의 합목적성으로 세속화된다.
헤겔은
이런 헤르더와 칸트의 자연목적론을 거부하고 자연목적이라는 추상적 신비적 표상이 아니라 자유라는 구체적 목적을 향한 역사를
주장한다. 헤겔의 역사적 목적론은 인간 자유의식의 진보라는 의미로 더욱 세속화된다. 이러한 역사의 발전의 필연성을 증명하기 위해
신학적 논의 구조를 차용하며 (김상환 교수님의 말을 빌리자면) 서양인들도 고개를 휘저을 만큼 강하고 극단적인 종말론을 표명했다.
헤겔은 잔혹하고 비극적인 역사적 필연성과 그 안에 계시된 섭리를 라이프니츠에게서 차용한 변신론을 통해서 자신의 역사철학을
옹호한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최종적 화해의 인식은 악 속에서 신의 현존을, 고통과 부정의 역사 속에서 긍정적 이성의 현존을
증명하는 것이 철학적 이성 인식의 과제인 것이다. "칸트, 실러, 헤르더와 마찬가지로 헤겔도 역사를 기독교적인 순진무구-타락-구속
시나리오의 세속화된 버전에 따라 설명했다"는 바이저의 설명은 정말 타당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체계화한 기독교
종말론 역사신학은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불의와 억압, 폭력 그리고 그에 따른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현세의 고통받는
사람들, 억눌린 자들을 위로하지만 구원이라는 사건을 역사의 종말 이후로, 즉 먼 미래 벌어질 그리스도의 대립 이후로 미룸으로써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지금 여기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이런 고통과 폭력 그리고 구원 사이의 공백, 미래를
바라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공백은 근대 역사철학 전부를 걸쳐서 살아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수행한 역사철학의 비판도 같은 것을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일어났던 일이 역사철학에서 반복되었다. 실제로는 고통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선은 역사의 노정을 규정하고 종말에 이르러서는
승리하는 힘으로 위장하였다. 그것은 세계정신으로 또는 내재적 법칙으로 우상화되었다. 그리하여 단지 역사만이 직접적으로 그 대립물로
전도된 것이 아니라, 사건의 필연성과 논리적 과정을 분쇄해야 할 이념 자체도 왜곡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의 천사는 언제나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천사는 현재 지금의 약자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역사
속에서 변신론적으로 정당화되어 버린 폭과 불의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대변하기 위해서 맑스와 그의 유물론적인 해방서사가 어떤 의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칸트와 헤겔에게 큰 빚을 진 바, 그에게도 진보의 환등상이 존재한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벤야민의 과제다. 하지만 벤야민에게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얼굴을 비춘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여기서
책에 관한 서술은 멈추고 싶다. 지친다. 이미 위의 글에서 드러났겠지만 난 갈 곳을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맑스의 유물론에 더 파고들어 뭔가 발견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너무 부대낀다. 벤야민의 생각조차 만족스럽지 못하다. 벤야민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배경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을 금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벤야민의 각성이 현실적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화되는지 의문이다. 너무 많은 의문이 든다. 배움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말이다.
다음 책은 무엇을 읽어야 할까에 대해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래도 노장사상이나 초기 불교에 대해서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재밌네. 기운내서 더 써라 노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