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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레바퀴 이후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는 페이크 르포 소설이며 동시에 흥미로운 사고실험이다. 소설은 단순히 가상적인 차원에서 존재하던 윤리가 현세의 물질성을 입은 채 실존하게 될 때, 목적합리성과 가치합리성이 모호하게 뒤섞이는 게임의 규칙 아래 세상은 어떻게 변하는가를 묘사한다. 그 변화를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은 단 한 가지뿐인데, 청색(선업) 영역과 적색(악업) 영역으로 이루어진 수레바퀴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 머리 위의 수레바퀴는 룰렛을 굴려 침이 멈추는 영역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 침이 청색에서 멈춘다면 영혼은 천국으로 떠나며(혹은 그렇게 믿어지며), 적색에서 멈추면 부질없이 지옥에 떨어진다.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공평한 포르투나의 수레는 (약간의 가산점과 감점 요소가 있긴 하지만) 죽음의 순간 선악을 분별하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실낱 같은 가능성에 의해 영혼이 구원받으며, 반대로 운이 나쁜 경우 극히 소소한 악업 때문에 지옥으로 끌어내려진다. 이 직관적인 '수레바퀴-게임'에는 몇몇 숨겨진 규칙들이 있다.


  규칙은 서구의 온건 리버럴 도덕과 산상수훈의 가르침, 업에 대한 동양적 사고 및 법률적 책임을 고약하게 뒤섞어 놓는다. 어떤 의미로 수레바퀴는 제1세계 시민들의 점잖음과 위선을 비꼬는 듯하다. 너희들이 그토록 이상적인 것으로 바라는 보편 윤리가 실제로 작동하게 되었을 때, 세상은 전혀 달라질 것이라고. 전지구적 자유주의 윤리의 이상은 단 한 번도 보편성에 이른 적이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짐짓 공허한 레토릭에 불과하다고. 해당 게임의 규칙을 대략적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악업을 부여하는 정도가 우리의 윤리적 직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살인은 중죄이며, 다른 강력범죄들 역시 중죄이다. 한편으로 길바닥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은 사소한 악업들도 누적될 경우 큰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선업의 경우는 극단적으로 온건 자유주의의 도덕률을 따라서 - 그 역시 보편윤리로 오늘날에는 직관적인 것이 되기는 했지만 - 다소간의 작위성에 이르는 면이 있다. 남을 정죄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며, 일반적으로 심판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슬래셔 무비를 보는 것은 허용되지만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수레바퀴는 채식을 권장하고,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을 중시하며, 전지구적 불평등의 조화로운 해소를 요구한다. 이 체계에서 자살이 특별히 죄가 아니라는 점도 특기해둘 만하다.


  2. 종종 결과주의적이지만 때로는 행위의 의도도 고려한다. 개인이 처한 조건과 개인의 책임 역시 종합적으로 판단하며, 따라서 전 세계 어느 국가에서나 평균적인 청색 비율은 65% 정도로 유지된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요구한다. 더 뛰어난 인지능력이 있는 개인에게는 대체로 더 명확한 윤리적 책임이 부과된다.


  3. 수레바퀴는 공정하다. 또한 자비롭다. 혹은 적어도 공정성과 자비를 제1의 미덕으로 삼으려 한다. 평균적인 인간의 청색 비율이 어디서나 65%에 이른다는 것만으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아무리 적색 비율이 높은 인간이라도 회개할 수 있으며, 타인을 돕는 것이라면 청색 타인을 돕든 적색 타인을 돕든 공평하게 취급된다. 적색 비율이 얼마든 다른 조건이 같다면 수레바퀴의 판단은 차별하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거나 부조리하게 살해당한다면 천국에 갈 확률은 더 높아진다.


  4. 수레바퀴는 합리적이다. 예측가능하며 예측가능성에 따라 행동하더라도 특별히 감점 요인이 되지 않는다. 종종 쇼와 엔터테인먼트의 원리가 신뢰보호의 원칙을 이기긴 하지만 대체로는 그렇다. 이 합리성 때문에 수레바퀴의 지배는 게임이 될 수 있다. 법적 안정성 - 또한 '법치국가'의 원칙 - 이 없다면 그것은 반복 게임으로 성립하지 못하며, 우리 사회의 무한한 무질서와 동등한 것으로 전락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측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 외부의 신'으로서 근대국가와 결정적으로 단절되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대심문관을 상대로 승리한 기이한 형태의 근대국가를 형성시킨다.


  이 게임의 체계는 많은 면에서 고약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구 자유주의 윤리 및 법의 위선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고약하고, 무엇보다 위선과 선 사이의 직관적인 위계를 전도한다는 점에서도 고약하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선이 위선과 구별되며, 선은 공동체 속에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선은 내면의 절대적인 양심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실의 정치들과 잠재적으로 적대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그에 반해 위선은 우리가 쓰는 사회적 가면이며, 성숙한 위선자는 자신이 혼자일 때도 위선의 가면을 벗지 않는다. 수레바퀴는 인류 개개인에게 성숙한 위선의 경지에 이르기를 강요한다. 혼자 있더라도 사회적으로 선한 페르소나를 유지하며, 항상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민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얽혀 있는 관계 및 따라나오는 책임을 돌보도록 요구한다.


  성숙한 위선은 물론 권장될 만한 미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것은 개인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로 여겨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성숙한 위선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으며,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 또한 둘러대라고 가르쳤을 뿐이다. 그러나 수레바퀴 시대의 재림 예수는 왼뺨을 맞거든 경찰을 부르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도 적과 친구를 나누는 결단주의적 정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 자유주의-신의 너무나 세속적인 통치는 신성한 것이 되기엔 꽤나 우스꽝스럽다. 인류의 23% 정도를 차지하는 '안티휠' 세력이 수레바퀴를 악마로 바라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니, 그것이 세상의 권세로 정말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상에야는 그리스도가 아닌 적그리스도라 여기는 쪽이 더 타당할 것이다.


  물론 수레바퀴-게임의 규칙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발상을 극단적인 영역으로 밀어붙인 사고실험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합리적인 자기 경영이, 또 게임의 규칙이 정해지면 반드시 그에 따라 행위해야만 하는 법치국가적 통치성이, 리얼리티 쇼와 엔터테인먼트의 원리가 현실에서 당위의 영역으로 전도된 상황 말이다. 이 사고실험은 꽤나 핍진성 있게 전개되며 그러므로 규칙 그자체는 조건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소설은 그 조건을 통해 충분히 재밌는 상황들과 재밌는 이야기를 제공한다. 수레바퀴 이후 세상에선 수많은 목소리들이, 수레바퀴의 통치에 실망하는 목소리와 그에 만족하는 목소리가 교차한다. 누군가에겐 총체적인 의미상실인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현세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구원이 된다. 77%대 23%라는 '수레바퀴 파 대 반 수레바퀴 파'의 비율은 20:80의 법칙을 묘하게 상기시킨다. 수레바퀴의 통치는 대략적으로 77% 정도의 사람에게 더 나은 세상을 보장해줄 것으로 여겨지는 그러한 규칙을 제공하며 작가도 딱 그정도의 성공을 가능케하는 틀로 구상했을 것이다.


  따라서 규칙보다 더 문제적인 것은 그 규칙을 조망하는 시선이다. 소설은 일관되게 합리주의와 실용주의의 시선에서 수레바퀴 이후의 세계를 묘사한다. 너무나 정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지는, 정상적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묘사. 인터뷰이들의 목소리를 교차시키는 페이크 르포라는 형식은 대화주의의 탈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 역시 일관되게 합리적이다. 비록 합리주의의 화신과 같은 수레바퀴가 유토피아적이면서 동시에 디스토피아적인 통치를 펼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그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관점까지 일관되게 합리적인 것은 기묘하다. 77%의 수레바퀴파가 모두 실용주의자라는 언급도 기묘하기는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수레바퀴파가 합리적 윤리의 폭력에 순응하는 세력이라고 한다면,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 역시 좀 더 공정하게 다루어질 필요성이 있다. 청색 비율이 높은데도 안티휠 측에 합류한 도덕주의자의 전공이 윤리가 아닌 수학이라는 점은 특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세계가 점점 더 나은 곳이 되어가고 있지만 누군가의 시선에선 여전히 파탄 상태라는 것, 청과 적이라는 이분법의 모호함은 내면성의 섬세함 앞에선 순전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세속적인 세상으로 실정법 그자체가 되어 내려와버린 구세주는 너무나 우스꽝스럽고 어색하며 자기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은 암시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작가의 의도인가? 일견 유토피아적으로 비치는 세상에서 왜곡된 신적 폭력의 그림자를 읽어내라는 것?


잘은 모르겠다. 어쩌면 어느 쪽도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고실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쪽이 더 건전한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