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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헌치백'은 장애인(disabled)을 우리가 어디까지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임계점을 측정한다. 권리신장과 국가 및 사회의 보조가 발맞춰 발전해왔지만 가령 종이책과 e-book중에 뭐가 더 나은가라는 논쟁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따라서 암묵적으로) 가정되는 누구나 종이책을 편하게 볼 수 있고 그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이나
(나나 우리 독붕이들도 종이책이나 이북 중에 뭐가 더 나은지 입장은 달라도 장애인의 관점에서 생각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다. 일단 나는 당연히 아니다. 소설의 이 부분은 내가 당연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몸이 불편하지만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재산을 상속받았기에 "돈으로 마찰에서 멀어진 여자"가 비장애인들이 흔히 짐작하듯 장애인이 다시 태어난다면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고, 몸을 파는 고급 창부가 되어 "마찰로 돈을 버는 여자"(p. 51)가 되고 싶다 말할 때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 등이 바로 그 임계점이다 (동시에 당사자성이 가진 강력함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존중(respect)만큼이나 존중받지 못할(disrespect) 권리 (누군가에게 "모나리자"(p. 72)가 되어 빨간 스프레이 공격을 받는 것)를 통해 당사자 (장애인)가 존중받는다고 느낄수도 있다면?

이치카와는 한나 렌의 소설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장애인은 매끄러운 사회의 적이라 (혹은 적으로 간주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동시대 장애인 담론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Disabled가 Dis(respect)abled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소설내용처럼 여자 장애인이 유복하다는 이유로, 돈이 없어 그 여자 장애인을 돕는 일을 하는 남자가 무심하게, pc하지 않게 던지는 언어폭력에서 오히려 빨간 스프레이 칠을 당한 모나리자가 될때, 그렇게 자신의 존재가 긍정됨을 느끼는 그 기이한 순간에 대한 묘사를 보라.

나같은 비장애인들의 생각의 피안에 있는 이런 것들은 나에게 (바라건대 우리에게) 장애인을 어디까지 받아들이는지 자문하게 만든다. 그저 우리는 (문턱 없는 배리어 프리 건물을 지읍시다라고 하면서) 매끄러운 사회를 만들면서 굽은 곱사등이는 사실 받아들이지 않는 (위에 나온 종이책과 이북 논쟁을 참조하라) 세상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곱사등이라니 그건 올바르지 않은 표현이에요 라고 하는 수준까진 우리가 이룩한건 사실이다) 장애인의 이야기는 매끄러운 담론으로 치환 혹은 번역 될때만 논의 되는게  (받아들여지는게) 아닌가?

야설과 웹소설, 라이트 노벨이 아니라면 당사자의 상상력은 표현 되지 못하게 차단되었던게 아닌가? 아마도 아쿠타가와상 심사진은 문학이 여기에 열려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오해하지는 말자. 장애인 당사자가 쓴 글이라 상을 준게 아니다.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장애인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문학은 진지하게 열린자세로 숙고하겠다는 선언을 수상으로 표현한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 자체도 장애인 당사자가 쓴 글이라는 점을 떠나서 전달할려는 문제의식이나 표현방식등에서 상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헌치백에 나오는 생각지도 못한 섹.스 장면의 구성에 당혹스러울 사람들도 많을테다. 십수년전 나온 '뱀에게 피어싱'이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그러나 뱀에게 피어싱은 SM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갸루와 양아치와 건달 타투이스트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사실 소녀가 어떻게 성인이 되는가를 다룬 성장소설이었다는 것을 독붕이들은 앍으면서 눈치챘을거라 생각한다.

헌치백은 물론 성장소설은 아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만큼 발전시켜온 사회(소수자의 권리신장과 장애인에 대한 국가 및 사회의 보조가 발맞춰 발전해온 사회)에 이르러서 더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게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는걸 독붕이들이 눈치 못채지 않을거라 생각한다.